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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40 715회 0건
가만히 누운 채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언제부터인가, 모르겠다.
아내가 있었었다.
맞아, 이혼 했구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못 본지가 오래되었다.
딸, 그리고 아들이 있다.

첫째가 딸이었지, 그 녀석 얼굴을 못 본지도 한참 되었다.
둘째인 아들녀석도 못 본지 참으로 오래되었다.
그리운 얼굴들이다.
그 얼굴들이 생각나자 몇 일 전, 그리고 오늘 아침의 기억이 난다.
오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진우가 기억하는 것은 오늘 아침이다.
오늘 아침에서부터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그래, 5년전이구나.
퇴직을 하던 그때로부터 5년이나 지났구나.
언제 지나간 줄도 모르게 5년이 흘렀다.

* * *

5년전.
당시에 진우는 말 그대로 회사에서 제법 잘 나가는 영업담당 상무였다.
사내에 부사장이 총괄하는 영업마케팅 부서가 있고, 그 하부에 3개의 영업본부를 두고 있는데 그 3개중에 하나를 진우가 맡고 있었다.
물론 부사장은 마케팅을 하기보다는 조정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세정산업, 회사생활 21년 중에 이 회사에서만 20년째 근무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회사에서 1년여 일을 하다가 옮겨간 회사가 세정산업이고, 그리고 지금까지 한눈 팔지 않고 세정산업에서만 일해왔다.
그리고, 기술직으로 7년을 근무한 이후에 영업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오랜 기간 동안 영업 마케팅을 해 왔고,
다양한 전략을 수립하여 마케팅을 하였고 그것을 뚝심으로 밀어 부쳐서 많은 성공을 이루었다.
그로 인하여 나름대로 회사에서 인정받는 유능한 임원이었다.

어디나 어느 곳에서나 그렇듯이 매니저의 자리는 좁아 들게 마련이고 진우는 그 경쟁 속에서도 한번도 밀리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키면서, 시기에 맞게 승진하여 세정산업에서 사업본부 하나를 맡고 있는 책임자였다.

사업본부라고 해 봐야 그리 큰 회사가 아니다 보니 인원은 그리 많지 않다.
영업마케팅 파트에는 3개의 사업본부가 있고, 그 중에서도 진우가 맡고 있는 본부가 인원은 불과 17 명, 3개사업본부 전체 인원의 20프로 밖에 안될 정도로 가장 적었지만, 회사 전체 매출의 절반을 하고 있었다.
진우가 맡고 있는 사업부의 책임자이며 상무였지만, 차기 영업마케팅 총괄임원으로 거론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항상 불행은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오기 마련인가,
대표이사 사장이며, 실질적인 사주인 박세영이 휴일에 지방을 다녀오다가 대형트럭과 추돌하는 사고가 발생해서, 차가 길 밖으로 밀려나면서 두 바퀴나 굴렀단다.

그 사고는 진우의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아니 진우뿐만 아니라, 세정산업에 근무하던 많은 사람들의 모든 것들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사장에게는 두 딸과 한 명의 아들이 있었고, 아들인 박승호는 회사는 다니고 있었지만, 아들인 박승호는 먹고 노는데 만 일가견이 있을 뿐 회사의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그런 인물이었다.

《저놈을 어떻게 사람을 만들 방법이 없겠는가? 》
박세영사장은 사석에서는 그렇게 진우에게 간혹 물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박승호는 아버지인 박세영의 말도 제대로 안 듣는 인물인데다가 안하무인이며, 막무가내인데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회사의 임원 말을 들을 리가 없다.

박세영은 진정한 사업가 이기도 했고, 직원들을 아끼는 특히 인재를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래된 직원도 많았고, 현재의 임원들을 모두 신입사원이나 과장 이하에서 입사하여 오랜 기간 근무하면서 임원이 된 그런 사람들이었다.


박세영은 실눈을 뜨고 진우를 포함하여 회사의 임원들을 바라 보았다.
“사장님,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박세영은 눈을 돌려, 김승환부사장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보였지만, 그것은 생각만 그럴 뿐 인 것 같다.
코와 입으로 연결된 호스로 인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간호사가 오래있지 못하게 한 탓에 밖으로 나와서 한쪽구석에 서서 서로간에 별 말도 없이 착잡한 심정으로 서있는데 박승호가 들어왔다.

“아버지는요?”
약간은 흥분된 목소리로 박승호가 진우 일행을 보고 물었다.
“들어가 보게, 많이 안 좋으시네.”
김승환이 박승호에게 말했다.

김승환은 영업마케팅을 총괄하고 있고, 직책은 부사장이지만 세정산업에 온지는 몇 년 되지 않았다.
박세영과의 친분은 오래 전부터 있었고, 감사원에 근무했었다는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 이상은 별로 말을 하지 않아서 왜 그만두게 되었는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진우를 포함한 사업본부를 맡고 있는 영업마케팅 총괄담당임원으로 늘 업무를 원활하게 이끌고 있었다.
“우리도 가세, 여기 더 있어야 특별히 달라질 것도 아니고.”



일주일이 지나자 박세영의 몸에 차도가 있긴 했으나,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혼자서는 대소변도 볼 수 없는,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사의 말로는 목을 심하게 다쳤고, 척추손상도 심한데다가 신경이 많이 손상되었고, 회복은 불가능할 것이란다.
거기다가 다른 각 부위도 많이 다쳐서 몇 차례의 수술을 통해서 어느 정도까지 고치기는 하겠지만, 정상적인 사회활동은 불가능할 것이란다.
그리고 언어장애는 영원히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단다.

절망적이다.
지금은 김승환 부사장이 사장을 대신하고 있지만, 이 상태로 회사의 사장자리가 계속 비어있을 수는 없다.
“사장님 할말 있으십니까?”
진우가 박세영에게 물었다.
손짓으로 무언가 쓸 것을 달라는 것 같다.
“김상무, 종이와 연필을 드려보게.”
김승환의 말이다.
“네,”
마침 오른쪽 팔에는 이것저것 호스들이 걸려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진우가 수첩을 펼치고 볼펜을 손에 쥐어주었다.

~승호를 잘 도와 주게, 나라고 생각하고~

아.
박세영은 박승호에게 사장을 맡길 모양이다.
이치상으로 보면 박승호에게 회사를 맡기는 것이 정상이다.
대부분의 주식은 박세영이 가지고 있고, 실질적인 오너이고 대표이니 그가 일을 할 수 없을 때 박승호가 이어받는 것에 대해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박승호는 경영수업은커녕 관리자 수업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회사 일에는 도대체 관심이 없고 일을 제대로 해 내는 것을 본 적도 없다.
그런데, 사장을 시킬 테니 임원들이 도와 주라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진우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했다.

박세영은 김승환 부사장, 오종상상무, 정명수 상무에게도 꼭 같이 눈길을 주었다.
김승환 부사장 휘하에 오종상, 정명수, 그리고 김진우 이렇게 세 사람이 상무이면서 각각의 사업본부장이다.
정명수까지 그러겠다고 대답을 하자 관리본부의 조정균상무와 경영기획총괄인 전철환 전무에게도 눈길을 주고 쳐다 보았다.

박세영은 자기가 공석일 때 박승호가 어찌될지 염려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치상으로야 어찌되었건 회사의 임원들이 힘을 모으면 박승호 정도야 전혀 힘을 쓸 수 없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회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시작될 수도 있다.
박승호가 회사를 망쳐놓을지 아닐지에 대한 염려보다는, 박승호가 밀려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데 더 신경을 쓰는 것 같다.
그래서 모든 임원들에게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지금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김승환 부사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20년 이상을 함께 일해온 임원들이다.



다음날, 박승호는 사장실에서 임원들을 불렀다.
사장자리에 앉아서 임원들을 오라고 부른 것이었다. 그리고 사장실로 들어서는 임원들에게 박승호는 턱을 들고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어서들 오십시오.”
김승환이 조금은 걱정되는 듯 아버지의 수술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 오늘 수술 아니신가? 그런데 어떻게 회사로 왔어?”
그 말에 박승호가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나는 표정으로 짜증을 잔뜩 섞은 말투로 김승환에게 시비조로 물었다.
“부사장님, 날 아직도 기획실 과장으로 보시는 겁니까?”
그 말에 김승환도 인상을 살짝 찌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참는 듯, 그리고 되물었다.
“무슨 소린가? 그게.”
김승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승호의 짜증 섞인 말소리가 사장실을 울렸다.
“이제 사장이 될 건데, 그때도 지금처럼 반말 하실 거냐 구요?”

그 말에 김승환은 조금 계면쩍게 웃었다.
“...”
박승호는 마치 김승환을 때릴 듯이 노려보면서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웃어? 지금 날 비웃는 겁니까?”

하, 이런, 이러면 대책이 안 선다.
저를 비웃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임원들은 박승호에게 여태까지 하대를 하였었다.
나이가 어리기도 했고, 하대가 이상할 것도 당연히 없지만, 박세영은 임원들에게 인사를 하도록 항상 박승호에게 시켰었다.
회사의 어른들이시니 네가 보고 배울게 많으니 항상 예의로 대해라고 하였었다.

그런데, 사장실 사장의 의자에 앉았다고 갑자기 존대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날 비웃는 거냐고 고함을 지르면 이건 대책이 안 선다.
이건 명확하게 시비를 거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아주 비굴하게 만들어 내 보내기로 한 것 같다.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등줄기에 한줄기 경련이 찌르르 스치고 지나갔다.



김승환은 박승호보다 거의 30살쯤 나이가 많다.
물론 김승환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다른 임원들은 박승호가 어릴 때 무릎에 앉아 재롱을 부릴 때부터 보아온 사람들이다.
그러니 아직 어린아이로 보일 것이다.

“자네한테 반말을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잠깐 동안 놀란 눈으로 좌우를 둘러보던 김승환이 박승호에게, 그러나 낮은 음성으로 달해 듯이 말했다.
“씨바, 좆 까는 소리하고 있네, 지금 그것 말고 뭐가 더 중요한데?”
박승호는 김승환의 말을 자르고 들어가며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말했다.
정말, 이정도 되면 심각하다.

김승환은 낮게 다시 말했다.
“자네, 자네 아버지도 나한테 이러지 않았어.”
그렇게 말한 김승환의 목소리가 떨렸다.
박승호는 떨리듯 말하는 김승환에게 다시 고함을 치며 상소리처럼 토해 냈다.
“그럼, 씨바 아버지한테 가서 내가 그러더라고 일러 바치 던가.”

이렇게 마구잡이에 막말로 나오면 대응자체가 무의미해 진다.
대화가 통하는 사람하고만 대화 할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나오면 이건 대화는커녕 아무것도 아니다.
“부사장님, 잠시 나가시죠. 좀 진정하시구요.”
진우는 김승환을 붙잡았다. 그리고 김승환의 눈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박승호가 조금의 예의도 없이 마치 깡패들이 말하듯 험한 말을 쏟아내자, 어떻게 대꾸도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김승환은 박승호를 노려보다가 진우의 팔을 잡고 일어섰다.
“지금 나가는 사람들, 이방에 다시 들어올 때는 사표 써서 와야 할거야.”
진우의 등 뒤에서 박승호가 뇌까렸다.
전철환이 진우의 반대편에서 김승환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그러지.”
진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김승환을 부축하고 나갔다.



김승환을 방의 소파에 앉으라고 했다.
전철환과 오종상이 함께 뒤따라 김승환의 방으로 들어왔고, 정명수는 자기 방으로 갔다.
그러고 보니 관리본부장인 조정균과 공장장인 허세일전무가 뒤따라 나오지 않은 것 같다.

“오상무, 나 담배한대 줄 텐가?”
진우도 그렇지만 김승환은 담배를 피지 않는 사람이다.
진우는 불과 2년쯤 전에 끊었지만, 김승환은 담배를 끊은 지가 10년도 넘은 것으로 알고 있다.
아직 담배를 끊지 않고 있는 오종상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김승환에게 한 개피를 내 밀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치 다른 때 같으면, 왜 그러시냐고 하면서 웃으면서 안 주었을 테지만, 오늘은 오종상이 말없이 건넸다.
그리고 라이터에 불을 부쳐서 김승환에게 내밀자, 김승환이 한모금 쪽 빨아들였다.

~ 콜록, 콜록~
10년이상 담배를 피지 않던 사람이니 기침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사장비서인 오은지 였다.
“김상무님, 오상무님, 박과장, 아니 사장님이 오시랍니다.”
김승환은 다시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이고는 진우를 쳐다보며 가보라는 표시로 턱을 두 번 들었다
“아닙니다, 지금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진우는 전혀 가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김승환에게 그대로 말했다.

“아냐, 어서 가게, 내 걱정은 말고, 자네들까지 그러면 되나.”
김승환은 떠 밀듯이 진우와 오종상을 내 보냈다.
진우는 김승환의 방 앞에서 얼마간 서성거렸다.

오종상이 진우의 소매를 잡고 끌고 갔다.
(그 방에 다시올 때는 사표 써서 오랬구나 참.)

관리부 박종호 과장이 회의실 입구에서 그쪽으로 불렀다.
“김상무님, 오상무님 회의실로 들어가시지요.”
“왜?”
“박과장, 아니 사장님 지시입니다.”
“그래 알았어.”



회의실 안에는 다른 임원들이 모두 앉아 있었다.
회의탁자 한쪽 끝에는 총무부장 예정길이 앉아 있었다. 예정길의 얼굴은 굳어 있긴 했지만, 뭔가 모르게 웃음을 참는 느낌이 배여 있다.
사람은 위기 때 본심이 나타나는 법이다.
(그래, 예정길 네가 그런 사람인줄은 이미 알고 있다.)
속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어서 오십시오. 이제 다 오셨네요, 김승환 부사장님만 빼고.”
박종호가 예정길에게 보고를 했다.
“다 오셨습니다. 예부장님.”
“응, 나누어 드려.”
박종호가 종이 한 장씩을 임원들 앞에 모두 돌렸다.

사직서.
사직서였다.
“박과, 아니 신임 사장님께서 임원들에게 일괄사표를 받아오라 하셨습니다.”
예정길이 임원들에게 말했다.
기존의 임원들을 정리하는 수순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김승환 부사장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주어서 도저히 회사에 나올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고, 그렇게 하므로서 구심점을 흐트려 버렸다.
그 다음에 김승환을 제외한 모든 임원들을 불러 일괄사표를 받으라고 한다.

이건, 박승호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분명 누군가의 코치를 받아서 처리하는 것 같은데, 누굴까?

예정길은 아니다.
도대체 누구의 지휘로 이렇게 전광석화와도 같이 추진하는 것일까?

이 속도와 방법은 기존의 임원들이 서로간에 의견을 교환하고 정리하여 대응체제를 준비할 틈을 주지 않는 신속한 처리방법이다.
이미 이 수순대로라면, 빠르면 1주일, 늦어도 한달 이내에 모든 임원들이 정리될 것이다.

진우는 예정길의 웃음도 아니고 심각함도 아닌 얼굴을 보자 화가 치밀어 올라서 예정길에게 화를 쏟아내고 싶었지만, 예정길의 눈을 쏘아보면서 읊조리듯 물었다.

“예부장, 자네 이 상황이 재미있나?”
진우의 쏘아보는 눈빛에 약간은 흔들리듯, 예정길이 조금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며 대답했다.
“아, 저, 그게 아니라.”
“그럼?”
“저도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뭐라 말씀 드려야 할지 모르지만, 박사장님이.”
예정길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진우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누가 사장이야? 사장님은 지금 병원에 있는데.”
“네?”
진우는 반문하는 예정길에게 다시 쏘아 부쳤다.
“이사회에서 결의를 했어? 아니면 주총에서 의결을 했어? 누가 사장이란 말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서 그렇다고 치자고, 그런데 총무부장이 그런 것도 구분을 못해?”
진우도 안다.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은, 말은 맞는 말이지만 중소기업이라는 데가 그런 요식행위는 말 그대로 요식행위일 뿐이다.
실권자가 하면 하는 거다.

예정길이 고개를 숙이고는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잠시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자자, 어찌 되었건 쓰라면 써야지 뭐.”
조정균이 분위기를 바꾸듯 말했다.
그 말에 진우가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예정길이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그래 까짓 거, 사장이 되었건 아니건 실권자가 쓰라면 써야지 뭐,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회사가 과장이 임원들에게 사표 쓰라고 명령하는 상황이 된 건가? 회사가 완전 개판이 되어 버렸네 이제.”
진우의 그 말에 정명수가 말을 받았다.
“그러네, 정말.”


그렇지만 그 이후로는 모두들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박과장, 여기 커피나 한잔씩 돌리지.”
공장장인 허세일 전무가 침묵을 깨듯이 박종호에게 커피를 주문했다.
“네, 그러겠습니다.”

몇 자 되지 않는 내용이니 쓰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지만, 다들 아무 말이 없었다.
진우는 사직서를 쓰면서 박승호가 무조건적인 망나니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상당히 치밀한 전략과 고도의 전술로 만들어진 시나리오인데, 진우가 알고 있는 박승호로서는 쓸 수 있는 수가 아니다.

대체 누가 코치를 했을까,
아니 누가 코치를 했건 아니건 그건 상관이 없다.
이대로라면 기존의 임원들은 모조리 잘려 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도 마땅히 없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답답했다.

아마 기존의 임원들은 대화와 타협을 기조로 하는 박세영사장과 너무나 오랜 기간 일해 왔기 때문에 그 방향에 습관처럼 길들여져 있다.
그리고 이런 극적인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
사직서를 쓰던 종이를 테이블 위에 놓고, 함께 앉아있는 임원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오랜 기간 함께 일해온 사람들이다.
나름대로 경쟁도 하고, 또 서로간 격려도 해 가면서, 어떤 때는 사장에게 인정받기 위해 남을 조금은 헐뜯기도 하면서, 고생도 함께 해 온 사람들의 침울한 얼굴들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간에 왜 그리 아등바등하며 살아 왔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임원은 임시직원의 줄임 말이라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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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해 드린바와 같이 유료로 연재한 사이트의 요청으로 인하여
어쩔수 없이 글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2부 부터의 모든 글이 내려졌습니다.
그점 독자님들의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여 주시리라 믿으며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독자님들의 건강과 건승을 기원합니다.
뜨락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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