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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잎새가 질 때까지 - 22부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1 23:49 1,155회 0건
22. 선택



선경은 의외로 침착했다. 그들이 뭐라 하든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선경에게 그들도 굳이 말을 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선경에게 있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선경은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할 뿐이었고, 그들도 그런 선경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이층 어느 방에 선경을 밀어 넣은 그들은 선경의 방 앞에 두 명의 사내를 보초처럼 세워놓았을 뿐 나머지는 간섭하지 않았다. 선경이 문밖을 나가려 하거나 창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탈출하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하긴 선경이 내려다 본 창문 아래에도 이미 다른 두 명의 사내가 장승처럼 서 있었다.

선경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사형수처럼 그들이 정한 시간을 기다리는 일 외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차 안에서 들은 지훈과의 통화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모든 것은 오늘 밤 12시를 기점으로 결정 날 것이었다.

(나로 인해서 지훈씨가 피해를 보면 안 되는데……)

선경이 걱정하는 것은 오직 그것 하나였다. 자신이 어떻게 되는가는 상관없었다. 우두커니 의자에 앉아 눈을 감은 선경에게 벽에 걸린 시계가 내는 똑딱 이는 소리가 비수처럼 마음을 파고 들었다.




“똑! 똑!”

누군가 선경이 있는 방의 문을 노크했다. 대답은 없었지만 곧 문이 열리고 누군가 쟁반을 받쳐들고 들어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간단한 샌드위치와 음료.

“먹어둬요. 힘든 하루가 될 테니.”

선경이 눈을 뜨고 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의미심장하게 선경을 내려다 보며 웃고 있는 남자. 송전무였다.

“기억하시려나? 하하하……”

어떻게 그를 잊을 수 있을까? 아련한 의식 속에서도 자신을 더듬던 손길이 그였을 것이라 선경은 늘 의심하곤 했었다.

“또 당신이군요.”
“또…라…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날 당신이 내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요?”

날카롭게 바라보는 선경의 눈길에도 송전무는 느글거리며 웃었다.

“눈치… 챘어요? 하하…… 맞습니다. 그날 선경씨에게 세상의 새로움을 맞보게 해드릴 뻔 했죠.”

송전무가 한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선경이 무척이나 긴장된 모습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런 선경에게 송전무가 손을 내밀어 귀 옆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얼굴도 가까이 다가와 선경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내가 보기에 넌 대단한 악기가 틀림없어. 물론 너 자신도 모르고 있겠지만 말야. 내가 다뤄본 여자 중에서도 너 같은 년은 아주 드물었지. 그런데 한 눈에 보이더군. 네 몸의 특별함이.”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에요?”
“처녀도 아니면서 그렇게 소극적일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그날 잠깐 만졌을 뿐인데도 몸이 반응을 하더군. 아주 섬세하게. 너도 기분 좋지 않았어?”
“헛소리 하지 말아요!”
“말은 그렇게 해도 네 몸은 기억하고 있을 거야. 그날 내 손길에 길들여지기를 바라던 네 몸 말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전무의 손이 선경의 무릎 위에 올려졌다. 그리고 짝! 소리를 내며 그의 뺨이 돌아갔다.

“더러운 인간!”

돌아간 고개 그대로 뺨을 어루만지던 송전무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은 여전히 뱀처럼 징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역시 꽃은 가시가 있어야 맛이지. 그런데 말야…… 그 가시도 거세면 뽑힌다는 걸 알아야 해!”

말과 함께 송전무의 손등이 거칠게 선경의 뺨을 때렸다. 그 거친 힘에 선경은 의자에서 밀려 옆으로 쓰러졌다. 그런 선경 옆으로 송전무가 바짝 다가서며 선경의 블라우스를 양 손으로 잡아 제켰다. 찌이익 소리를 내며 블라우스가 찢어져 나가고 백옥의 피부와 봉긋한 가슴을 다 가리지 못한 검은색의 브래지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이거야. 이 뽀얀 살결. 남자를 부르는 향기와 같은 거지. 넌 말야 천성적으로 남자를 부르는 꽃인 거야. 아무라도 와서 꺾어주기를 바라는 들꽃 말야. 후후후……”

선경은 정신이 없었다. 그만큼 송전무의 손짓은 폭력적이었다. 그러나 귓가에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는 더욱 폭력적이었다. 몸이 떨려왔다.

“이런…… 역시 여자다 이건가? 떨건 없어. 여자는 그저 사랑해주는 남자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 되는 거야. 난 구태여 네 마음까지 원하지는 않으니까 말야. 그런데 참 신기하게 여자들은 몸이 가면 마음도 가는 경우가 많더군. 그래서 자신을 짓밟은 사람에게 애정이 깃들기도 한다더라고. 너도 그럴까? 크크……”

그가 혀를 내밀어 드러난 선경의 어깨를 핥아왔다. 선경이 어깨를 움츠리며 그를 피해 벽 쪽으로 기어갔다. 그런 그녀를 송전무는 먹이를 바라보는 맹수처럼 잔인한 웃음으로 따라왔다.

“겁낼 것 없어. 너도 곧 나에게 감사하게 될 거야. 네 몸의 감추어진 즐거움을 깨우쳐준 것에 대해서 말이야.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선경의 뺨을 한 손으로 만지며 그가 말했다.

“넌 결국 여기 모인 남자들 모두에게 기쁨을 주어야 하는 존재야. 알아? 왜냐면 말이지, 네 새 남자친구는 결코 여기 오지 않을 거거든. 구태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널 빼내갈 바보가 어디 있겠어? 어쩌면 넌 이미 다른 사내들의 노리개가 되어 정액으로 샤워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하하!”
“퉤! 미친 놈!”

침이 얼굴에 튀자 송전무가 손으로 그 침을 닦고는 비릿한 웃음으로 선경을 바라봤다.

“아직 시간 있으니 조금 더 기다려주지. 하지만 12시가 지나면 넌 걸레년이 될 거야. 내가 장담하지. 단 하루도, 아니 몇 시간도 남자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창녀로 만들어줄 테니까. 기대하라고.”

송전무가 나갈 때까지 선경은 벽에 기대어 그를 노려봤다. 그러다 문이 닫히자 그제서야 복받치는 설음에 눈물을 흘렸다. 이제 자신은 여자로서 더 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생각에 슬펐다. 지훈과의 며칠이 그래서 더욱 그리웠다.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자꾸만 머리를 스치고 이제 다시 그런 시간이 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절망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어떡해요, 지훈씨…… 나 이제 다시는 당신을 바라 볼 수 없게 될 것 같아요.)

소리 죽여 흐느끼는 선경의 흐트러진 어깨 위로 무거운 시간의 무게가 쉬지 않고 눈처럼 조금씩 쌓여갔다.




어둠이 내리고도 한 참 후, 누군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번에는 노크조차 없었다. 들어온 자들은 선경이 있는 방문 앞을 지키고 있던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방안으로 몇 걸음 들어와서는 의자에 앉아 등을 보이고 있는 선경에게 말했다.

“시간이 됐습니다. 아래층으로 내려 가시죠.”

선경이 한 쪽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시계는 자정까지 30여분 정도 남아 있었다.

“밖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화장을 좀… 고치고 싶어요.”

그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눈짓을 하더니 말했다.

“서두르십시오.”
“알겠어요.”

그들이 다시 문을 닫고 나갔고 선경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훈이 택시에서 내려 휠체어를 밀며 대문 앞에 이르자 저절로 문이 열렸다. 문 안쪽에는 여러 명의 남자들이 주위를 살피며 그를 맞이했다. 그 중 누군가가 지훈의 휠체어를 뒤에서 밀려 했지만 지훈이 거절했다. 집안의 모든 곳이 그의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도록 시설되어 있어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지훈 혼자 휠체어를 움직이기에 불편한 것은 없었다.

거실에 들어서자 커다란 샹들리에 아래에서 만면에 미소를 띈 중년의 사내가 손을 활짝 펴며 말했다.

“어서 오너라. 올 줄 알았다. 참, 고맙구나.”
“……”
“자, 이리로.”

그 자가 앞서 가는 곳은 손님을 맞이할 때 사용하는 접견실 용도의 방이었다. 이 집의 주인이었던 지훈이 졸지에 손님으로 대우 받는 순간이어서 지훈은 내심 씁쓸했다.

방에는 여러 가지 장식과 초상화, 그리고 꽃들이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벽 주변을 따라 여러 개의 푹신한 소파가 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 주인의 자리에 앉은 그가 몇 걸음 앞에 휠체어를 세운 지훈을 향해 말했다.

“오랜만이지만 언제나처럼 편안하더구나. 바뀐 것이 없어. 그래서 역시 집이 최고라고 하는 모양이다. 하하……”
“선경씨는요?”
“아, 그 예쁜 아가씨? 아니, 유부녀니까 미시…라고 불러야 하나? 어쨌거나 그 숙녀분은 이층에 잘 계시니 걱정할 것 없다. 사인만 하면 곧 만나서 데려 갈 수 있으니까. 박변호사, 준비된 서류 주세요.”

한 켠에 서 있던 남자가 서류 가방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내 그자 앞에 있는 테이블에 내려놨다.

“자, 시간도 늦었으니 더 지체할 것 없이 어서 정리하자꾸나. 이게 말한 대로 네 명의의 모든 회사 주식을 내게 양도한다는 문서고…… 사인 하는 즉시 네 통장에 20억을 입금시켜주마. 바로 확인해볼 수 있을 게다. 그 정도면 아마 둘이 새로 시작하는데 부족하진 않을 게야. 하하하!”

그의 웃음에 지훈의 몸이 잘게 떨었다.

“먼저 선경씨를 보고 싶습니다.”
“정 그렇다면……”

그가 지훈의 뒤에 서 있던 누군가에게 말했다.

“이층으로 안내해주게.”




선경이 있는 문 앞에서 지훈이 서둘러 노크를 했다. 그러나 방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시 노크를 했다. 마찬가지였다. 불안했다. 지훈이 손잡이를 잡고 돌리자 열리지 않았다.

“선경씨! 선경씨!! 나에요 지훈! 선경씨!”

지훈이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쳤지만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당황한 것은 지훈뿐이 아니었다. 문 앞을 지키던 두 사람과 지훈을 안내한 사람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훈의 휠체어를 옆으로 밀어낸 두 사람이 몸으로 문을 부딪혀갔다. 그렇게 몇 번의 충격 후에 문의 일부가 부서지며 거칠게 열렸고 지훈도 서둘러 문 안으로 들어섰다.

“선경씨…… 선경씨!”

절규 같은 지훈의 소리에 아래 층에 있던 사람들까지 대부분 뛰쳐 올라왔다. 그런 그들의 눈 앞에는 창문 위 벽장식에 전기줄을 매달아 목을 맨 채 흔들거리는 선경의 늘어진 모습이 보였다.

“이, 이런!”

지훈의 큰아버지란 자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렇게 모두들 넋을 잃고 바라만 볼 때, 어느새 지훈이 창가로 다가가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을 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구도 지훈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 못했다. 커튼 끝을 잡은 지훈이 있는 힘껏 커튼을 잡아 당기자 커튼이 뜯겨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지훈이 외쳤다.

“아저씨!”

그 말과 함께

“탕!”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창문을 뚫고 날아온 총알이 선경의 목을 잡고 있는 전기줄을 끊으며 지나갔고, 선경의 몸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떨어지는 선경을 지훈이 휠체어에서 손을 뻗어 간신히 받아 들었다.

“선경씨!”

황급히 목에 감긴 줄을 풀어내며 지훈이 선경을 흔들었다. 창백했던 선경의 얼굴에 다시 붉은 빛이 돌기 시작하고 얼마 후

“지… 훈… 씨!”
“정신 차려요, 선경씨!”
“왜… 왔어요……?”
“선경씨……”
“나 때문에……”
“아닙니다. 아니에요. 내겐 선경씨보다 귀한 것은 없어요.”
“지훈… 씨……”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부비며 눈물을 흘릴 때 또 다른 여러 사람이 방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 아버지?”
“왜 그리 놀라냐? 귀신이라도 본 것 같구나.”

그 소리에 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




지훈의 큰아버지와 그를 따르던 자들은 얼마 뒤 경찰들의 호위 속에 깊은 어둠에 묻힌 저택을 조용히 빠져 나갔다. 수갑을 찬 그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몇몇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심히 불안한 눈빛으로 주춤거렸다. 사냥개의 역할에서 표적의 역할로 바뀐 그들은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에 경찰들이 옆에 있음에도 자꾸만 몸을 움츠리며 숨어들고 싶어 했다. 그렇게 그들이 연행되어 사라지고 나서 집안의 거실엔 사람들이 흩어지고 몇 사람만이 남아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그래……”
“네. 연락도 안되고 또 큰아버지가……”
“알고 있다.”

할아버지의 깊은 주름이 더욱 깊어진 듯 보였다.

“재복이 내게 부탁을 하더구나. 잠시 연극을 좀 해주면 안되겠냐고.”
“아저씨가요?”
“그래. 내가 세상에 없다 생각해야 어둠 속의 존재가 본색을 드러낼 것 같다고 하면서.”
“그랬군요……”
“그래서 여행을 떠난 것으로 위장을 했지. 그리고 그 여행 중에 사고를 당한 것처럼 꾸미고. 재복이 너 조차도 속이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미리 말을 안 했단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하긴 그렇게 치밀한 함정을 파지 않았다면 큰아버지가 자신의 실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았을 것 같았다.

“큰아버지가 관련된 것… 아셨어요?”
“사실…… 네 애비가 사고를 당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설마 했구나. 그러다 나중에 재복이 회사내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해서 따로 알아봤지. 그 때 어느 정도 짐작을 했단다. 그렇지만 못난 자식도 자식이라 어쩌지 못했던 것이지. 그래도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나오리라곤 알지 못했단다. 다 내 불찰이야.”

할아버지는 몹시도 후회가 되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니? 아무리 내 자식이라도 죄를 지었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지. 회사도 몇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고 회사 구성원 전체의 것이니 내가 나서서라도 정상화 시켜야 하는 것이 도리고. 다만 어서 네가 회사 전반을 파악해줬으면 좋겠구나. 이 나이면 나도 좀 쉬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렇지 않니?”

지훈이 고개를 숙였다.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회사일과는 무관하게 살려 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할아버지.”
“음?”
“경찰은 어떻게?”

경찰이 출동한 것은 의외였다. 그저 할아버지 손에서 마무리 될 줄 알았건만.

“재복이 내게 보낸 자료가 결정적이었지. 그 전에는 어떻게 손을 대기 어려웠거든. 그러다 이번에 부녀자 납치, 성폭행에 관한 증거 자료를 확보하는 바람에 그들 모두를 한 번에 정리할 수 있게 된 거란다.”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선경을 피신시키며 이번이 절호의 기회라던 재복 아저씨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런데 이름이 선경씨라고 했던가요?”

할아버지가 지훈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선경을 향해 물었다.

“네, 어르신.”

선경이 살짝 고개를 들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람 목숨은 귀한 거라오. 아무리 어려워도 그렇게 쉽게 포기하면 안 되는 거지. 그렇지 않소?”

나무라는 그 말에 선경은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나에게 죄송할 건 없고, 선경씨를 아끼는 사람에게 미안해 해야지.”

그 말에 선경이 지훈을 바라봤다. 안 그래도 지훈을 보기 너무나 미안했다.

“미안해요, 지훈씨. 나 때문에 지훈씨가 모든 걸 잃게 될까 봐……”

지훈이 선경의 손을 꼭 쥐었다.

“아까도 말했잖아요. 내겐 선경씨보다 귀한 것이 없습니다.”

선경의 눈에 금새 눈물이 번졌다.

“할아버지, 저……”
“말 안 해도 안다. 나도 젊었던 시절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일이란 순서가 있는 법이니 하나씩 풀어나가도록 하고.”

그 말은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감사하긴. 그나 저나 넌 언제 일어나서 걸을래?”
“네?”
“이 놈이 할아버지를 쉽게 생각하는구나. 내 모를 줄 아냐? 네 몸에 변화가 왔다는 걸.”
“어, 할아버지 설마……?”

선경도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설마 은밀한 두 사람의 관계를 저 분이 안다는 말인가? 갑자기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물드는 선경이었다. 지훈도 어쩔 줄 몰라 했다. 오직 할아버지의 유쾌한 웃음이 한동안 거실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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