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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잎새가 질 때까지 - 14부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1 23:50 1,074회 0건
14. 내일이 올 때까지 1



놈들의 차가 서고 나도 멀찍이 차를 세웠다. 놈들이 들어간 저 철문 너머의 집은 별장인 것 같았다. 공원묘지 근처를 지나 막다른 길의 끝에 있는 곳.

(이제 어떻게 한다?)

망설여진다. 저 세 놈 정도라면, 아니 조금 더 있어 십여명 정도만 되어도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저 안에 얼마의 사람이 있을지 또 어떤 실력자가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목표로 삼고 있는 그 자가 있을까?

시간이 갈수록 지혜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생각으로 그 귀한 시간을 소모하고 있다. 어쩔 수 없다. 부딪혀보는 수 밖에. 모험을 하지 않고 해결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차 뒤에서 필요한 장비를 챙겨 배낭에 넣고 등에 맨 후 모자를 깊숙이 내려쓴다. 선글라스를 밴드를 이용해 뒤로 묶어 혹여 몸싸움을 하게 되더라도 벗겨질 염려 없게 준비하고 대문 옆 쪽으로 돌아가 주변에 있는 제법 큰 나무에 올라 쌍안경으로 다시 한 번 건물 주변을 확인하고는 담쟁이 넝쿨이 우거진 담장을 한 번 올려다 본다. 그리 높지 않아 오르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다행히 철망 따위도 처져있지 않다. 문제는 건물 주변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다. 밤에도 식별이 용이한 적외선 카메라가 사방을 지키고 있다. 또 한 쪽엔 개 집이 있다. 틀림없이 개도 있을 것이다. 마침 바람이 나를 향해 오고 있어 지금은 냄새를 맡지 못했겠지만, 내가 다가가면 개들도 분명 눈치를 채겠지.

(마침 차 안에 소시지가 있지!)

다시 차로 가서 간식용으로 준비했던 소시지를 배낭에 챙긴다. 나머지 소소한 물건들도. 옷을 벗고 위장복으로 갈아입는다. 얼굴에 위장크림을 바른다. 이런 모습을 해본 것이 아주 오래지만 몸은 지난 날의 고된 반복을 기억하는 듯 익숙하기만 하다. 신발도 군화인지 등산화인지 모를 것으로 갈아 신고 차 바닥을 열고 감춰둔 물건을 꺼낸다. 승단 기념으로 받았던 진검. 혹시나 해서 갖고는 다녔지만 이렇게 쓰일 줄은 알지 못했다. 칼집에 벨트클립을 덧댄 진검을 배낭처럼 등에 맨다.

다시 담장으로 다가간다. 아까 보아둔 카메라와 카메라 사이의 아주 작은 사각의 위치로. 실제 카메라 상에 잡히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는 없지만 잡힌다 해도 이 거리에서는 쉽게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적외선 카메라의 특징상 일정 거리 이상은 제대로 잡기 어려울 테니.

담장에 뛰어 올라 손을 뻗어 담벽을 잡고 몸을 끌어 올렸다. 재빠르게 담장 위에 다리를 걸친 채 주변을 살핀다. 조용하다. 개들도 아직 나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담을 넘어 내려섰다. 다시 주위를 살펴보지만 특별한 변화는 없다. 역시 첫 번째 난제는 개들일 것이다. 만약 조금만 소리가 나도 또는 바람의 방향만 바뀌어도 개들은 여지 없이 경계의 소리를 낼 것이다.

개집은 현관 앞 쪽에 있다. 이 시간이면 개들도 자고 있겠지. 일단 조용히 그 앞으로 이동해가야겠다. 바닥에 엎드려 낮은 포복으로 조용히 다가간다. 정원에 드문드문 심어진 나무들이 지금은 도움이 된다. 그렇게 개집이 있는 곳 몇 미터 가까이 접근 했을 때, 살며시 고개를 드는 내 눈에 무언가가 보인다. 직감적으로 등골이 오싹하다.

“크르릉!”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경계의 이빨을 보이는 녀석들. 설마 매어있지 않고 풀어서 키울 줄이야! 실수였다.

(롯트와일러!)

빠르게 결정해야 한다. 앞에 둘, 바로 뒤에 하나. 녀석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일어설 시간조차 없을 것이다. 천천히 손을 뒤로 돌려 칼을 잡으려 한다. 녀석들이 으르렁거리며 조금씩 다가선다. 겁이 없는 이놈들은 잘 짖지도 않는다. 단지 공격할 틈새를 볼 뿐이다. 드디어 손에 칼이 닿는 순간 앞에 있던 놈 중 하나가 달려든다. 아마도 대장격일 것이다.

“으흡!”

머리를 숙이며 칼을 뽑아 낮게 한 바퀴 회전하여 돌린 후 몸을 옆으로 굴리다 일어선다. 그 사이에도 칼은 낮은 위치로 계속 몸을 따라 회전했다. 걸렸다! 칼의 베임이 느껴진다. 다음 순간 발이 뜨겁다. 어느새 한 녀석이 발을 물고 있다. 제기랄! 그리고 다른 녀석이 이제 막 뛰어 올라 내 얼굴을 향해 이빨과 발톱을 세우고 날아 온다. 베어낼 틈이 없다. 그렇다면 가장 빠른 공격은 찌르기!

“얍!”

칼이 녀석의 목을 관통했다. 그러나 무게 때문에 칼이 밀려 내려온다. 그대로 무게를 따라 내려오며 베어냈다. 칼이 놈의 몸에서 빠져 나오자 이내 발을 물고 있는 놈의 머리를 골프샷처럼 날려 버린다. 서걱이는 뼈의 잘림. 그리고 쏟아져 올라와 가슴과 얼굴에 튀는 피.

밀려오는 통증에 주저 앉았다. 머리가 없는 채로 녀석은 여전히 다리를 물고 있다. 지독한 놈! 그보다 더 지독한 것은 허리가 베어진 이후에도 다시 공격하기 위해 다가오는 저 놈이다! 녀석이 뛰어오른다. 그러나 이번엔 내게 공간과 시간, 여유가 있다. 뒤로 한 걸음 빼며 몸을 돌리면서 베어나간다. 상쾌한 베임이 진검이 주는 쾌감을 상기시켜준다. 두 토막으로 떨어지는 놈의 모습이 잔인한 그림 같다.

손으로 아구를 벌려 머리 없는 놈의 이빨을 발에서 떼어내고 나니 피가 솟구친다. 이건 녀석들의 피가 아니라 내 피다. 피가 솟구친다는 건 큰 혈맥에 상처가 났다는 뜻이겠지. 제길! 바지 한 켠을 칼로 찢어내고 무릎 아래를 묶었다. 평소라면 서둘러 치료해야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지혜가 지금 저 건물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제발 잘 견뎌주기를!




충격이었다. 1층 거실에 있던 세 놈을 조용히 처리하고 칼과 물품들을 현관 한 켠에 내려 놓고 위장크림을 지운 후 녀석들 중에 체구가 가장 비슷한 놈의 양복으로 갈아 입고는 소리의 흔적을 따라 지하로 내려왔을 때, 벌거벗겨진 채 침대 위에서 또 다른 세 놈에게 유린당하고 있는 지혜의 모습은. 당장 달려나가 지혜를 데리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여기 온 목적은 많은 시간과 어려움을 인내하고 얻은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설령 지혜와 나 자신을 희생한다 해도 이 기회는 놓칠 수 없었다. 이런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도 알 수 없었다.

(나타날 것이다. 오늘은 반드시! 꼭 그래야만 해.)

내가 기다리는 그가 나타날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했다. 이 살 떨리는 광경까지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주위를 살펴봤다. 그가 나타나기 전에 더 은밀히 이곳의 상황을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가장 라이트가 적게 비치는 사이드로 한번에 조금씩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도록 주의하며 옮겨갔다. 빛이 내 다리만을 비추고 대부분의 무대 아래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 그러면서 무대 위의 사회자 역할을 하는 자의 등 뒤. 지혜의 옆 모습이 보이는 자리.

“자, 이제 이번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벤트가 시작됩니다. 모두들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봐 주십시오!”

무슨 뜻일까? 상상하지 못했던 이벤트라…… 사람들이 조금씩 더 무대를 향해 바짝 다가섰다.

“이 이벤트는 우리의 존경하는 회장님께서 직접 시연해주시겠습니다. 자, 오랜만에 참석하신 회장님을 뜨거운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이어 건너편 어둠 속에서 멋진 수트를 빼 입은 자가 손을 흔들며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왔다.

(드디어! 그래 오늘에야 당신을 보는군. 확실하게 말이야. 그럴 줄 알았어. 이 모든 것의 배후에 당신이 있을 것이라고. 나쁜 놈!)

그 자가 손을 들어 박수에 답례하고 마이크를 건네 받자 모두들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조용해졌다.

“회원 여러분,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 동안 우리 회사를 이끌어 오시느라 수고들 많으셨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비록 지금은 경영에 참여하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렇듯 마음 든든한 것은 바로 여러분들이 회사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주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 오늘 이 자리도 어떤 면에서 그러한 여러분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한 자리와 같습니다. 모두 함께 즐겨주시고 우리 모임과 또한 회사 발전을 위해 함께 나아갑시다.”

다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고 그 자가 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 항아리 하나를 들고 무대위로 올라와 그 자의 앞에 내려놨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 항아리로 모이고 나도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 때 무대에 있던 두 놈이 지혜의 두 발을 잡아 벌렸다.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지혜도 이상한 느낌이 드는지 긴장된 얼굴로 자신의 벌려진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파괴를 거쳐 다시 더 큰 아름다움이 됩니다. 알고 있습니까?”

그 자의 말에 모두가 광신도처럼 외쳐댔다.

“네에!”

소리가 지하실을 쩌렁이며 울렸다.

“저도 과거의 실패에서 일어나 새롭게 여러분 앞에 서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가 실질적으로 회사의 경영권을 쥐고 여러분을 직접 진두 지휘할 날이 이제 곧 올 것입니다.”
“와아아아!!”
“우리 모두 그날을 위해 우리만의 결속력을 더욱 다지고 이사회를 완전히 장악하는 날까지 분투노력하도록 합시다.”
“네에에!”
“그럼 시작해 볼까요?”

그 말에 본부장이란 자가 그 자에게 고무장갑을 건넸고 그 자가 장갑을 손에 꼈다. 그리곤 항아리로 두 손을 들이밀더니 무엇인가를 끄집어 냈다.

“와!”
“오우!”

저마다의 신음과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자의 손에 들린 그것은 예상치 못하게도 살아 꿈틀거리는 튼실한 장어였다. 그 자가 머리와 몸통을 잡고 드센 녀석의 몸부림을 제어하는 동안 본부장이란 자가 장어의 머리에 무언가를 씌웠다. 콘돔이었다. 이제야 녀석들이 하려는 짓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지혜를 봤다. 지혜도 그들의 의도를 눈치챈 듯 놀란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두 다리를 잡고 있는 놈들로 인해 지혜의 저항은 무기력하기만 했다.

콘돔 씌우기를 마친 본부장이란 놈이 옆에서 또 무언가를 집어 들고 지혜의 가랑이 사이에 흘려 보냈다. 그리곤 손바닥으로 그것을 문질러 펴는 듯한 시늉을 했다. 오일이었다. 터질듯한 열기가 뇌로 치솟았다.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니라 생각했다. 저 자를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그런 증거.

(지혜야,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줘. 부탁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바램뿐이었다.

그 자가 몸부림치는 장어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미친 것들처럼 질러대는 환호성 속에 그 자가 느릿하게 지혜에게 다가가서는 보기에도 흉측한 그것을 서서히 지혜의 중심을 향해 가져갔다.

“안돼, 제발……”

지혜의 입에서 흐르는 힘없는 그 소리가 내 귀엔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시선을 돌릴 수는 없었다. 그대로 서서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우와아! 들어간다!”
“정말 저게 들어가는 거야?”
“세상에! 엄청 요동치는데?”
“저럴 수가!”

참아야 했다. 아직 저 놈의 행각을 다 드러내지 못했으니.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눈을 떴다. 우연이었을까? 지혜와 눈길이 마주친 것 같은 착각은. 반쯤 떠진 지혜의 눈이 초점을 잃고 풀려가고 있었다. 입술이 벌어지고 숨이 가쁜 듯 가슴을 들썩였다. 아니 허리를, 아니 몸 전체를 들썩이고 있었다. 구멍을 찾아 숨으려는 장어의 습성이 지혜의 몸 깊은 곳을 파고들며 마구 요동쳤고, 실제의 느낌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 광경이 보는 모든 이들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의 환호성은 어디를 가고 바늘만 떨어져도 들릴 듯한 고요함이 가득했다.

“하아… 하아… 아아악! 그만! 제발… 제발 그만해……”

몇 번을 펄떡이던 지혜의 몸이 힘을 빼고 늘어지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 자의 얼굴에 웃음이 맴돌았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장어를 천천히 뽑아냈다. 마지막 그것의 머리가 꿈틀거리며 빠져 나올 때 고여있던 물처럼 무언가가 지혜의 몸 속에서 주르륵 흘러 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놈들마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이제 모두를 위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준비들 되셨습니까?”
“네에에!!”
“그럼 곧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무대장치를 담당하기라도 한 듯 다시 누군가가 무대로 무언가를 갖고 올라왔다. 그것은 얼핏 보기에 마치 산부인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구와도 비슷하게 생긴 것이었다.

곧 아까의 침대가 치워지고 형틀처럼 생긴 것 위에 지혜가 눕혀졌다. 두 다리는 지지대 위에 올려져 벌린 채 묶였으며 두 손도 벌려져 묶였다. 머리는 받혀주는 것 없이 아래로 쳐져 있었다.

“13번 이하 번호는 본부장님을 선두로 위쪽으로, 나머지 번호는 회장님을 선두로 아래쪽으로 시작합니다. 자, 어서 줄을 서시오!!!”

그 말과 함께 어수선한 분주함 속에 두 개의 줄이 서로를 마주보며 무대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늘어섰다. 나는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아래쪽 맨 끝 줄에 섰다. 마침 어둠 속에 묻힌 곳이라 나를 숨기기는 쉬웠다.

“오늘의 하일라이트! 시작합니다. 우선 최현석 대리님 무대 위로 올라와주시겠습니까?”

모두의 박수 속에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현석이 등장했다. 그는 제법 상기된 표정이었다.

“오늘의 골든벨 주인공인 최현석 대리입니다. 곧 과장 승진을 앞두고 있죠. 물론 당연히 잘 되겠죠? 골든벨까지 울리셨으니까요. 그렇죠, 여러분!”

함성과 박수소리가 크게 울렸다. 현석이 양쪽으로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비굴한 놈!)

세상에 자기 아내를 팔아 성공하려는 미친 놈이 존재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하긴 이미 여러 여자와 놀아났다는 것도 알고 그 중엔 아내의 친구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과 그 아내의 친구도 실제로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녀석은 자신의 아내가 함정에 빠지도록 아내의 친구를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녀석은 몰랐을 것이다. 그 아내의 친구란 여자가 오히려 그 자신을 모임에 끌어들이기 위해 사용된 미끼였다는 것을. 희영이란 여자는 미국에서부터 이미 모임의 핵심멤버 중 하나인 해외사업본부장이 미주지역총괄책임자로 있을 때 그의 섹파로 시작해 오래 전부터 모임에 참여하게 된 터였다.

“예비 최과장을 위하여 건배를 제안합니다!”

무대에 장치를 운반했던 건장한 체구의 두 사내가 한 명은 양주병 몇 개를 쟁반에 받아 들고, 한명은 잔들을 받쳐 든 채 해외사업본부장의 아내란 여자를 따랐다. 여자가 미소와 함께 잔을 나눠주고, 술도 함께 따라줬다. 마지막은 나였다. 여자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묻힌 나를 보며 잔을 내밀었다. 나는 조금은 떨리는 손으로 잔을 받았다. 여자가 미소 지으며 잔에 술을 따르다 말고 말했다.

“누구… 시더라?”

긴장감이 몸을 스쳤다.

“신입… 입니다. 미쳐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저는……”
“아, 그래요? 몸이 제법… 실한 듯 한데…… 그쵸?”
“네? 네. 젊어서부터 운동은 꾸준히 했습니다.”
“어디 어느 정도나 힘을 쓰는지 무척 궁금하군요. 나중에 한 번 보여주겠어요?”
“네, 원하신다면 최선을 다해서……”
“호호호……”

여자가 눈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무대 중앙으로 올라가서 나를 한 번 쳐다봤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왜 그런지 소름이 돋았다.

(느낌이 나빠. 저 여자……)

여자는 표정의 변화 없이 사회자를 향해 잔을 내밀고 그에도 잔을 채웠다. 그리곤 자신과 함께한 두 남자에게 잔을 채우고 마지막으로 자신도 잔을 하나 들고는 술을 들고 있는 남자에게 잔을 내밀었다. 남자가 술을 채우자 사회자가 외쳤다.

“건배!”

그 소리를 따라 모두 함께 외쳤다.

“건배!”

술잔이 비워지는 소리가 급하게 들렸다. 그리고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그들은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무대 여기 저기에 그들이 던진 옷들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당황스러웠다.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뒤로 빼 더 깊은 어둠으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 아무도 나를 의식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들은 지금 당장 자신들의 앞에 몸을 벌리고 있는 무대 위의 제물에만 온 신경이 가있는 듯 했다.




그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증거를 위해 내가 아끼는 여자의 유린 장면을 낱낱이 지켜 봐야 했던 시간들에 대해서. 비록 남들이 쉽게 생각할지도 모르는 술집 여자이고 스스로 몸을 파는 여자일지라도 지혜는 누구에게서라도 사랑 받기에 충분한 여자였다. 집안의 어려움만 아니라면 그런 일을 할 사람도 아니었거니와 그런 일을 하면서도 마음까지 타락하지는 않았다. 한편으로 그 모든 갈등을 잘 견뎌내는 무척이나 강한 내면을 갖고 있기도 했고, 그 만큼 남들이 짐작할 수 없는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연약한 여자이기도 했다.

지혜는 내가 자신을 탐하지 않는 것을 늘 이상하게 생각하곤 했다. 내가 성적으로 이상이 있는지 자꾸만 확인하려 했고, 자신이 매력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술집여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이유를 알고 싶어했다. 나도 남자이고 그녀를 사랑하고 무척이나 갖고 싶어 했다. 그럼에도 지혜를 탐할 수 없었던 이유를 나는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에 대한 자책 때문이었다. 내가 지켰어야 할 사람들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과, 그 결과로 몸의 반신 기능뿐 아니라 성기능까지 상실한 도련님에 대한 미안함이라는 그런 것들.

그런 내 마음이 지혜를 안을 수 있고 함께 새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도련님의 마음에 사랑을 일깨운 선경이라는 여자 때문이었다. 그 두 사람의 미래가 아름답게 연결될 수 있다면 나도 조금은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이기적인 자족감 말이다. 그것이 내게는 어느 새 하나의 꿈이 되었고, 목표가 되었다. 그 목표를 위해서 결국 내가 아끼는 지혜를 희생물로 삼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고.

이제 내가 원하는 결과는 다 이루어져가고 있었다. 이사장님은 둘째 아드님의 사고에 처음부터 의문을 갖고 있었고 내 책임이 전부가 아니라고 다독였다. 그 분의 예리한 판단력과 추리력은 시간이 갈수록 사실이 되어 갔고, 긴 시간의 추적 끝에 그 분의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도 하나씩 벗겨지고 있었다. 비록 물증은 빈약하고 심증만이 대부분이었지만 오늘 그 자의 등장으로 그가 이 모든 모임의 실세이며, 그 행위의 목표가 이사회 장악을 통한 경영권 획득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이제는 지혜의 정체가 드러나기 전에 어떻게 여기서 함께 빠져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생각 속에 있을 때, 그 육욕의 현장 한 가운데 있던 본부장의 아내란 여자가 두리번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를 찾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여자가 사회자의 귀에 무언가 귓속말을 했다. 그리고

“잠깐만, 여러분!”

모두의 시선이 행동을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원래는 모든 행사를 다 치룬 후에 오늘의 주인공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만은 오늘은 특별히 이쯤에서 가면을 벗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회장님도 오셨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최대리님? 동의하시겠습니까?”

현석은 조금 어리둥절한 듯 보였다.

“물론 이 모든 장면이 녹화되고 있기 때문에 혹시 얼굴이 공개된 자료가 유출될 경우를 염려할 수 밖에 없겠습니다만 아직까지 우리 모임에서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철저한 자료 관리를 통해서 기록물로서만 보관하고 있지요. 동의하시겠습니까?”
“회원분들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자가 의심을 가진 것이 틀림없었다. 상황이 급해졌다.

“그럼 바로 가면을 벗고……”

사회자의 뒷말은 듣지 못했다. 나는 이미 지하실을 나와 서둘러 현관 입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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