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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1 23:53 1,175회 0건






63. 소식 없으면 아빠한테 다 말할꺼야.




한낮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기는 해도 더웠었다. 그런데 밤이 되니까 그 더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말 시원한 밤 11시이다. 밤을 밝히는 불빛은 어둠을 몰려든 밀어내고 한참 화려하다.

그 불빛에 임영선의 예쁘장한 얼굴이 빛난다.

큼직한 검은 눈매.
위에서 아래로 약간 긴 듯한 뾰족한 콧날.
좌우로 약간 긴 듯한 도톰한 빨간 입술.

이들은 아래위로 약간 긴 얼굴을 꽉 채운다.
임영선의 얼굴이 내 눈을 꽉 채운다.



"뭘 자꾸 보는데?"
"어? .. 그냥. .. 임비서 얼굴."

"왜 보는데?"
"예쁘니까."


"이제야 바른 말 하네. 하하."
"나는 여자한테 이런 것으로는 거짓말 안한다."

"말이 나왔으니까, 나도 한마디 하자.
나도 오늘 태현씨의 너무 많은 면을 본 것 같아.
안봐도 되는 것들까지."

"뭘 봤는데?"

"승부욕을 부릴 데가 따로 있지,
여자 가슴 만지는 일에 그 정도로 목숨 걸고 덤벼드냐?"

"그것은 승부욕이랑은 전혀 상관이 없고, 목숨 걸은 것도 전혀 아니거든."

"만지라고 한다고 이 가슴 저 가슴 닥치는 대로 다 만졌잖아?
그렇게 옷 속에 손까지 집어넣고 만지면 좋으니?
가슴 뿐이었어?
보자보자 하니까 아예 그냥 온몸을 주물탕거리더만.
남자란 하나같이 다 똑같다니까.
아오. .. 변태같은 종자들."

"그건 임비서가 모르니까 하는 소리야.
이 동네에서는 하라고 할 때, 하라는 것을 하는 것이 좋아.
안그러면 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거든."

"더 엄청난 일이라면, 그건 또 뭔데?
여자들이 옷을 훌렁 벗고 덤벼들기라도 한대?"

"여자들이 옷 벗고 덤비면 다행이지.
날더러 벗으라면 어쩔꺼야?
아까 아슬아슬하게 때워 넘기는 것 못 봤어?"

"하긴 .."

"여자들끼리 의기투합 제대로 하면 엄청 무서워져."

"남자들은 안 그러나?
그 동물들 발정나면 여자들보다 훨씬 더 무서워지지."

"택시 온다. 타자."



나는 택시를 세워서 임영선이 타도록 뒷문을 열어주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 팔을 잡아 끌고 탔다.



"너네 집 어디야? 택시 출발해야지.
기사님께 말씀 드려."

"아. 맞다.
기사님, 목동 한상백화점 쪽으로 가주세요."



택시는 임영선이 산다는 아파트를 향해 출발했다. 임영선이 내게 기대오면서 내 귀에 입을 가까이 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갈꺼야?"
"무슨 소리야?"

"내 몸 여기저기를 다 만져놓고, 그냥 모르는 척 하고 가느냐고."

"눈을 가리고 만져서 하나도 기억에도 없거든.
내가 임비서라고 알아차린 것은 화장품이랑 향수였지, 가슴이 아니었잖아."

"어쨌든 안팎으로 만진 것은 만진거잖아."

"내가, 뭐, 만지고 싶어서 만진 것도 아니거든.
기호 1번 하겠다고 제 발로 걸어 나온 사람이 누구지?"

"그것은 미리 우리끼리 순서를 짜두었던거야.
그렇게 적나라하게 만지는 줄 알았으면 내가 왜 거기 나갔겠어?"

"알았어. 그러니까 그 얘기는 고만 하자."
"그러지 말고 우리 집 근처에서 딱 한 잔만 더하고 가죠?"

"오늘은 늦었잖아.
다음에 해요."

"다음에 언제?"

"같이 일하다 보면 이럴 날이 또 없겠어?
그리고, 우리 앞으로 .. 그냥 같이 일하는 사이로 하자.
어색하게 다른 것 갖다 붙이지 말고."

"싫어. 욕심 나는데 어떡해?
자기는 나 싫어?
내가 자기 마음에 안드는거니?"

"싫지도 않고, 마음에 들기도 해.
그렇다고 해서 사귄다는 것은 어이없잖아?
여자 사귀는 것은 나는 자신도 없고, 또 나랑 맞지도 않아.
난 그런 것은 잘 못하거든."

"왜 못하는고, 왜 안 맞을까?"
"그런 것. .. 지겹고 따분해."



그런데 택시가 출발할 때부터 임영선은 내게 기대고 있다. 아까 노래방에서 내가 만졌던 가슴이 내 팔을 누르고 있다. 임영선의 머리는 내 어깨에 얹혀져 있다. 임영선의 손은 언제부터인지 내 허벅지에 놓여있다. 그녀의 가지런한 손가락이 내 허벅지를 천천히 오르내리다가 지긋이 누르며 살짝 움켜쥔다. 나에게 힘이 불끈 들어간다.



"나는 자기가 오늘처럼 그러는 것이 싫거든요."
"뭐가?"

"우리 아빠는 태현씨에 대해서 기대가 커요."
"무슨 기대?"

"아빠가 보니까 자기가 가진 가능성이나 능력이 엄청난 것 같대요.
그런데 자기는 하는 짓이 뭐 이래?"

"하는 짓? 아까 노래방에서?"

"이 여자 저 여자 끌어안고, 만지고, 춤이나 추고 말이야."

"임비서도 거기서 다 봤잖아.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거든."

"그래. 그런데 그 여자들이 왜 그랬겠어?
자기가 회사에서 아직 임자 없는 몸이니까 그러는 거잖아.
내가 자기를 확 차지해버리면 그런 일이 다시는 안일어날껄요."



그녀의 아파트 앞에서 택시가 섰다.
나는 임영선을 달래서 혼자 내리게 했다.



"이번 주말에 전화 기다린다.
소식 없으면 아빠한테 다 말할꺼야."

"뭘 말해?"

"오늘 있었던 일."
"야아. 임비서. 이건 뭐. .. 너 완전 파파걸이냐?"

"그렇다. 왜?"



그녀는 혼자 내렸고, 나는 그 택시를 계속 타고 내 오피스텔로 왔다.


임영선이 나한테 대쉬해오는 이유는 결코 내가 좋아서가 아닐 것이다.
아마도 회식 자리에서 다른 여자들이 설치니까 눈꼴시다는 말이겠지.

그래봤자 우리가 본 것은 겨우 오늘 하루인데.
단 하루를 겪어보고 좋다며 사귀자고?
아무리 초고속 시대라 해도 이건 너무 빠르다.
이 코드는 나랑 맞지 않다.

내가 한수경과 사귀기로 마음 먹은 것은 2년을 알고 난 후였다.
우리는 2년동안을 거의 매일 학교 기숙사에서 살면서 거의 같이 살다시피 했었다.




내 오피스텔에서는 조해수와 지혜가 식탁과 책상에서 조용히 공부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린은 없다.

내가 들어가자 조해수가 나를 보고 한마디 하는 것을 지혜가 받는다.



"회식 잘 했어요? 보나마나 술 마셨겠지?"
"술만 마셨겠냐?"

"뭐라는 거야?
저녁 먹고 술 한잔 마신 것이 전부야.
회식이 원래 그런 것 아냐?"

"쯧쯧. 하던 공부나 계속하자."

"아니야. 오늘은 됐어.
난 고만하고, 이제 집에 갈래."

"이러언 벌써 12시네."

"엄마는?"
"방금 전에 자러 올라갔어."



얘들은 짐을 챙겨서 내 방을 나갔다.
아이린은 냉커피를 만들어서 냉장고에 두었다.
나는 책상에서 냉커피를 마시면서 노트북을 켰다.





캐나다의 한수경에게서 이메일이 와있다.




To 태연


늘 입던 옷에 화장도 별로 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날더러 요새 엄청 예뻐졌단다.
아마도 내가 너를 다시 만나고 왔기 때문이 아닐까?

너 한 사람을 생각하면, 별 일이 아닌데도 웃음이 나온다.
너와 같이 보낸 그 시간에 대한 기억들 때문에 행복에 빠진다.

우리의 사랑은 점점 자라고, 흔들리지 않겠지?
우리는 이 사랑 때문에 흐트러지지 않겠지?

이 사랑이 뭐냐고 묻는다면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런 사랑이라면 우리는 애당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꺼야.

세상살이가 녹녹치 않을 때, 내게 버틸 힘이 없을 때 내 손을 잡아줄 네가 있다.
내 마음에 상처가 생겼을 때, 그 아픈 상처들을 감싸줄 사랑이 있다.

너는 나를 선택했고, 변함없이 나를 기다려주고, 우리에게 사랑이 싹트게 했다.
너는 나의 향기만이 아니라, 나의 약점과 악취도, 지저분한 나의 삶까지를 모두 안았다.

너는 나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안아주었다.
나를 안아준 사랑의 품 안에서 나는 다시 피어나는 장미의 그윽한 향기가 된다.

가시 돋힌 장미는 피어나서 사랑이 되고, 아침 해가 떠오르면 안개는 죽고 없어진다.
너의 품 안에서 나는 사랑과 죽음 모두를 택할 것이다.
이렇게 나는 너를 죽도록 사랑하고 싶다.
나는 남아있는 내 삶 전체를 너를 사랑하며 살고 싶다.


From 수정






한줄 한줄에서 한수정의 외로움과 고독이 읽혀진다.
지금 나에게는 왜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핑 도는 걸까?
부산 수정이네 집의 주방에서 창문 밖으로 보이던 해운대 앞바다가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같이 보낸 일주일은 짧은 시간이었다.

너의 빈 방에, 또 네가 사는 그 도시에 너 혼자 있다고 해서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너는 거기에, 그리고 나는 여기에 있다.
이렇게 너와 내가 혼자로 있으면서 "우리"라는 것이 되어있잖아.
우리의 고독과 외로움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이 믿음과 사랑인가?





최은희 박사가 전화해달라는 메시지가 생각났다.
전화하기에는 늦은 시간이라서 약간 망설여졌지만, 그래도 전화를 했다.



"박사님, 너무 늦었죠? 주무세요?"
"아니야. 나도 이제 막 들어왔어."

"무슨 일 있으세요?"
"수정이가 이메일을 보냈는데, 날더러 태현씨를 한번 만나라고 했거든."

"수정이가 만나라고 안 했어도 만나야죠."
"내일 몇시쯤 한가해? 서이사님 일도 있고 .."

"오후 늦게요."
"그럼 태현씨한테 저녁 예약할께."

"좋아요. 그렇게 해요.
오후 네시쯤에 모시러 갈께요."

"그리고 말이야."
"예?"

"나한테 박사님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엄청 귀에 거슬려.
우리가 업무 때문에 만나는 것도 아니고, 사제지간도 아닌데.
그런 소리 들으면 내가 바짝 긴장하거든."

"알았어요. 다음부터는 안그럴께요.
그럼 아줌마는 쫌 그렇고, 누나라고 해야 하는데. .."

"잘 자고 내일 보자."





내 등 뒤에서 백허그를 해온다.
지혜다.
나는 내 가슴에 모아진 지혜의 손을 쓰다듬었다.



"소리 없이 언제 들어왔어?"
"오빠가 전화하는데 어떻게 소리를 내?"

"조해수는 갔니?"
"응. 오빠, 와인."

"왜 또?"
"오빠한테 할 말이 .."

"알았어. 소파에 준비해 둬."



나는 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지혜는 소파의 탁자에 와인 마실 준비를 해두고 누군가와 카톡을 하고 있다.

내가 소파에 앉자 지혜가 내 잔에 와인을 따른다.



"오빠. 내가 하는 말 듣고 기분 나빠하지 마요."
"무슨 말? 기분 나빠할 말 같으면 아예 하지 마."

"이건 안해서 될 일이 아니거든. 꼭 해야해."
"뭔데?"

"엄마랑 나랑 같이 오빠한테 부탁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나 공부할 때 조해수도 같이 껴주면 안돼?"
"그건 또 갑자기 왜?"

"걔도 노답이라서 엄청 답답한가봐.
아까 여기서 저녁 먹으면서 엄마한테 징징 짰어.
이틀 같이 해보니까 너무 좋다고 꼭 같이 하게 해달래."

"그건 안되는데."
"왜 안돼? 오빠 지금 화 많이 났어?"

"그런 말로 내가 왜 화를 내냐?
생각해봐.
조해수는 공부 끝나고 나서 밤 늦게 어떻게 집에 가지?
허구헌날 택시로 다닐래?"

"그건 걔가 알아서 할 일이죠.
걔 엄마 성격에 실으러 다닐 수도 있고.
아니면 여기 뭐 하나 월세라도 얻어서 같이 살든가."

"지혜야. 왜 일을 키우려고 그러는데?
그냥 너 혼자 조용히 하면 안되겠니?"

"나도 당연히 그게 좋죠.
그런데 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걔정도로 막강했었잖아?
혼자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서 시작도 못하는데, 오빠가 조금만 끌어주면 되거든."

"글쎄. .. 걔는 그래서 될까?"
"조해수 그 정도로 심각해?"

"걔가 심각한 것이 아니라 남은 시간이 문제죠."
"아직 고2니까 그런 걱정은 마시고, 오빠는 허락이나 해주세요."


"그건 지혜 네가 알아서 결정해."



우리는 와인을 한잔씩 마시고, 지혜가 내 손을 잡아 끌면서 침대로 갔다.



"이제 새벽이면 춥더라.
오빠가 소파에서 자면 허리도 아프고, 이불 걷어차고 자면 감기 걸려.
오빠한테 딸린 식구들이 있으니까 조심해야죠."

"네가 덤벼들지만 않으면 침대에서 자도 괜찮거든."
"잠들을 때만 잠시 그러는 건데, 그걸 못 받아주냐?"

“잠시가 아니니까 문제지.”



우리는 침대에 누웠다.
지혜는 늘 하던 대로 내 입술을 빨면서 내 몸 위로 기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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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일 202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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