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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1 23:57 1,157회 0건
26. 지혜 아빠 서영환 전무를 만날 준비



나는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러서 전화를 받았다.



"영심이가 나한테 전화를 다하고, 웬일이니?"

"우리 원래 전화 자주 하던 사이거든요?
요새 내가 콘테스트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한동안 전화를 못했다고, 너도 토오옹 안하더만."

"미안. 난 또 영심이가 나한테 다른 생각을 하는 줄 알았네."
"내가 너한테 다른 생각을 할 일이 있기는 있고?"

"아. 그래. 그렇군. 그런가? 그래. 무슨 일이야?"
"얘가 채널을 잘 못 맞췄나? 왜 이렇게 버벅거려?"

"오케이. 이제 채널 바로 잡았다. 그래 무슨 일이야?"
"휴가라던데, 우리나라에 있나, 아니면 외국 어디로 나가셨나 해서."

"부산에 와서 이틀밤 자고 올라간다. 외국은 무슨 외국?"
"부산? 그럼 너 또 해운대에 갔구나?"

"그래. 이제 나가보려고. 나 해운대 간 것은 어떻게 알았어?"
"보나마나지. 거기는 분명 한수정 집 근처고."

"맞아. …."

"그럼 그렇지. 네가 부산에 갔으면 당연히 해운대지.
아무튼 잘 쉬고 와. 그럼 서울에는 언제 올라와? 내일? 모레?"

"내일 밤 늦게."
"그럼 우리는 금요일 점심 시간에 학교 도서관에서 보는 걸로 하자."

"어? 그럴래? 그럴까?"
"왜? 내가 보자니까 별로니?"

"야아. 뭐가 별로라는 거야? 너 이상한 소리 할래?"
"너 내가 하는 말 자꾸 이상하게 들을래?"



한수정에 대해서는 무엇이 급한 일이라는 것일까? 주영심은 거기 대해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럼 윤기숙은 나에게 무슨 얘기를 한거지? 둘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궁금할 때 전화기를 들고 통화를 한다. 이번에 나도 그랬다. 그런데 통화가 끝난 지금은 통화하기 전보다 훨씬 더 궁금하다.





아이린이 옷을 입고 거실로 나오고, 경식이도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왔다. 우리는 지혜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아이린은 자기 가방과 애들 가방까지 꺼내서 큰 목욕타올과 몇개 안되는 음료수들을 있는대로 담았다.

우리는 아침을 김밥 도시락으로 간단하게 해결하고, 택시를 타고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갔다. 그런데 우리가 일찍 도착한 것이 아닌데도 해수욕장에는 사람들이 유난히 적었다. 비치 파라솔은 텅텅 비어있는 곳이 엄청 많다. 우리는 물가 쪽에 있는 비치파라솔 한개를 점령하고, 아이린은 가져온 타올을 깔았다. 나는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턱없이 비싼 돈을 지불하고 냉커피와 차가운 음료수를 구해왔다.

나는 우리 자리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 옆에 약간 나이든 남녀가 파라솔 그늘에 앉아서 수평선 쪽을 바라보며 서로 이야기를 하고있다. 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내가 구해온 차가운 오렌지 쥬스 캔 두 개를 건네 주면서 짧은 대화 몇마디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부부이며, 대구에서 오늘 새벽에 출발하여 얼마 전에 해운대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들의 말로는 휴가 끝 무렵인데다가, 오늘은 기온이 낮기까지 해서 사람들도 별로 없단다. 또 수온도 낮아서 온 사람들도 물이 차기 때문에 수영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겉옷을 벗고, 안에 입고 온 수영복 차림으로 그늘에 앉아있었다. 지혜는 꽃무늬가 있는 비키니로 가려야 할 곳만을 간신히 가리고 있다. 지혜와 경식이는 서로를 찧고 패고 장난을 치다가, 경식이가 먼저 달려가서 바닷물로 첨벙 뛰어든다.

그런데 경식이가 모래사장을 달릴 때에 다리를 약간 절뚝거리는 것 같았다. 지혜는 경식이를 잡겠다고 뒤따라 물로 들어갔다. 물에도 사람들이 별로 없다. 나는 애들 둘이 장난치며 노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들은 다행히 바다를 향하여 멀리 가지는 않는다.

아이린이 내게 물었다.



"자기, 수영은 잘해?"
"잘은 못해도 웬만큼 할 줄은 알아요."

"좋겠다. 나야 뭐 물에만 들어가면 쇠망치라서. ... 하하."

"여기는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조오기 바로 앞에 얕은 데라도 들어가요.
그래도 누나는 해운대로 피서를 왔는데 바닷물을 구경만 해서 되겠어요?"

"아이. 난 괜찮아. 내 걱정 하지 말고, 자기나 들어가요."



나는 두리번거리면서 구조대원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았다. 그런데 전망대에는 아직 아무도 없다. 작은 구조선만 한 척이 물에 떠있다. 우리가 너무 이른 시간에 나온 건지, 아니면 저들이 지금 다른 일로 바쁜 건지.

나는 옆에 있는 노부부에게 잠시 우리 자리를 봐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리고 아이린의 손을 잡아 끌다시피 하여 물로 들어갔다. 우리는 가슴 정도의 깊이까지 들어갔다.

노부부의 말대로 바닷물이 차다. 아이린은 인상을 찡그렸지만 조심스럽게 천천히 한걸음씩 나를 따라왔다. 우리가 물에 들어가자 경식이와 지혜도 우리에게 왔다.



"안춥니?"
"오빠, 노인네야? 시원하기만 하구만."

"경식이는?"
"괜찮아요."



그렇지만 이들의 입술은 파랗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물이 따뜻해지는 가를 보고, 그렇지 않으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물장구를 치고 서로에게 물을 끼얹으며 놀았다. 그런데 경식이가 몸놀림을 부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자주 눈에 띈다. 나는 잠수를 해서 지혜와 경식이 사이로 간 후에 둘 사이로 솟구쳐 올라서 그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지혜는 아이린의 몸을 물 속으로 당기고, 아이린은 기겁을 하면서 두 손을 허우적댄다.

나는 물 밖으로 나와서 저들이 노는 모습을 휴대폰에 있는 카메라에 담았다. 동영상도 찍고, 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식이와 지혜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야아! 이 왕변태야! 어딜 내 가슴을?"

"누나,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야. 아푸푸."
"일부러 그런 것 다 알거든. 빨리 안 와? 아푸푸."

"가면 죽이려고 할꺼면서?"
"당근. 내가 살려둘 것 같아?"



경식이가 소리를 지르면서 수영을 해서 도망치고, 지혜는 고함을 치며 헤엄을 쳐서 경식이를 쫓아간다. 아이린은 저들을 등지고 내 쪽으로 돌아서서 물 밖으로 나오고 있다. 경식이가 수영을 하기는 하는데, 이상하게도 손과 발을 움직이는 것이 어색하다. 그래도 지혜보다는 빠르다.

이 때 내 머리 속에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스친다. 영화나 소설에 보면 물에서 도망치다가 아니면 뒤를 쫒다가 팔다리에 쥐가 나면서 물에 잠기는 장면이 떠오르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저런 좋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 저들을 보고 있었다.

아이린은 웃으면서 나에게 애들이 노는 것을 부러워하는 말을 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녀가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혜가 가슴부터 물 위로 내놓고, 나를 부르며 손짓을 한다.



"오빠! .. 오빠! .. 경식이! .."



경식이가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고개를 둘러보았으나 경식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까 경식이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물에 들어가던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아이린에게 전화기를 던져주면서 말했다.



"여기서 꼼짝하지 말고 차분하게 기다려요."
"왜 그러는데?"



아이린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쏜살같이 물로 뛰어들어서, 지혜를 향하여 헤엄쳐 갔다.

지혜 앞쪽으로 가서 경식이가 있을 만한 곳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는 잠수를 하여 물 속으로 들어가서 여기 저기를 살폈다. 물 밖에 나가서 심호흡을 하고 다시 물 속으로 들어왔다.

저 앞에 덩어리가 꿈틀거리는 것이 희미하게 보인다. 그런데 거기는 바닥이 갑자기 약간 깊어지는 곳이다. 저게 만일 경식이라면, 경식이가 갑자기 놀라면서 다리에 쥐가 나기라도 한 것 같다.

나는 일단 물 밖으로 나가서 숨을 쉬고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서 그 물체가 있는 곳으로 갔다. 경식이다. 경식이가 두 손으로 허우적대고 있다.

나는 바닥으로 가라앉아서 경식이의 한쪽 손목을 움켜잡고, 위로 당겨 올리면서, 일단 물 위로 헤엄쳐 올라왔다. 그리고 지혜를 소리쳐 부르면서 꼼짝하지 말고 그 자리에 있으라고 소리를 지르고, 모래사장에 있는 아이린을 향하여 헤엄쳐서 갔다.

그제서야 모래밭에서는 구조대원 두명이 아이린 앞쪽으로 오고, 물에서는 구조선이 내 쪽으로 왔지만, 나는 경식이의 팔을 목에 걸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구조대원들이 나와 경식이에게 덤벼들어서 경식이를 같이 잡고 물에서 나갔다. 나는 다시 헤엄쳐서 지혜에게로 돌아갔다.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지혜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빠, 경식이 죽었어? 아니지? 죽은 거 아니지? 경식이 살았지?"
"죽긴 누가 죽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지혜의 두 눈에는 바닷물인지 눈물인지가 주렁주렁 열려있다. 나는 지혜와 함께 천천히 헤엄쳐서 모래사장 쪽으로 갔다. 우리는 무사히 물 밖으로 나왔다.

아이린은 경식이 옆에서 벌벌 떨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저대로 그냥 두면 아이린은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될 것 같다. 이럴 때에 차라리 뭔가 할 일이 있으면 침착해질 수도 있다고 주워들은 것이 기억났다.

나는 경식이에게 큰 일이 생긴 것은 아니라고 아이린을 안심시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아이린에게는 물건을 챙겨서 가방을 싸라고 하고, 지혜에게는 엄마를 도우라고 했다.

나는 수건과 생수병 하나를 들고 경식이에게 갔다. 그들이 그새 경식이에게 어떻게 했는지 경식이가 머엉하니 앉아있다. 나는 생수로 수건을 적셔서 경식이의 입 주변을 대충 씻어주었다.경식이 눈동자의 움직임을 보니까 이상이 없는 것 같다. 경식이 입에 생수병을 대주었다.



"삼키지 말고 먼저 입을 헹궈서 뱉어."



경식이는 입을 두세번 행궈내고나서 몇 모금을 삼켰다. 구조대원들은 인공호흡을 시킬 필요까지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들은 나에게 한마디 했다.



"오늘은 수온이 낮아서 물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우리가 말했거든요."
"미안해요. 서울에서 왔는데 물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그냥 올라갈 수 없잖아요? 잠깐만 얕은 데에서 놀다가 그랬어요."

"그래도 우리가 보이지 않으면 물놀이는 자제하셨어야죠."



그들은 우리가 물 속에서 한시간 가까이 놀고있었어도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았고, 우리에게 어떤 경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근무태만에 대해서 한마디 할까 생각했지만, 저들도 알바하는 대학생들이리라 생각하고 참았다. 나는 미안하다고만 말했고, 그들은 우리를 떠났다.

아이린은 경식이를 끌어안고 울고 있다. 지혜도 같이 울먹인다. 그러나 경식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오히려 엄마와 누나를 안심시킨다. 우리는 샤워부스에 들어가서 간단하게 몸을 헹구기로 했다.

내가 샤워부스에서 제일 먼저 나와서 돌계단에 걸터앉았다. 이 모든 일들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났고, 또 너무 빨리 진행되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두렵고 소름이 끼친다. 내 뒤로 경식이, 지혜, 그리고 아이린까지 나오는 대로 모두 나처럼 돌계단에 걸터앉는다.

경식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린과 지혜는 너무 놀란 것 같다. 아이린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내가 물에 뛰어들어가서 경식이를 끌고 나오는 것을 보고서야 사태를 파악한 것 같다. 지혜는 자기가 동생을 위험한 곳으로 몰아붙여서 이 지경까지 가게 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아이린이 일어서서 나에게 말했다.



"태현씨 아니었더라면 우리 오늘 어쩔 뻔 했어? 경식이가 잘못될 수도 있었잖아? 남자 없이는 무서워서 이런 데에 올 생각도 못한다니까."



지혜와 경식이도 아이린을 따라서 일어섰다. 지혜가 엄마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우리한테 오빠가 있잖아요. 얼마나 다행이야? 안그래?"




우리는 겉옷을 걸치고 택시로 호텔로 돌아왔다. 한 시간 정도 후에 다시 만나서 점심 먹으러 가기로 하고 각자 방으로 헤어졌다. 나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서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경식이가 나를 깨우는 바람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경식이는 침대 옆에 서서 내 손을 잡고 있고, 아이린과 지혜는 거실 소파에 앉아있다.



"형. 너무 피곤하게 주무셔서 우리가 한참 기다렸어요.
이제 일어나서 점심 먹고 다시 주무세요."

"미안해. 어서 나가자."

"오빠, 밖에는 나가지 않아도 돼요.
오빠 피곤할꺼라고 엄마가 치킨이랑 피자를 주문했는데, 방금 도착했네.
이리 와서 따끈할 때 같이 먹자."



지혜도 나에게 와서 내 손을 잡고 소파로 갔다. 아이린은 앉아있는 우리에게 피자를 덜어주고, 애들은 맛있게 먹는다. 나와 아이린도 같이 먹었다. 경식이가 아이린에게 말했다.



경식 : "엄마, 이거 먹고 우리 거국적으로 낮잠을 자면 어떨까?"
아이린 : "어제는 네가 날더러 잠이나 자려고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냐고 놀렸는데?"

지혜 : "아냐. 경식이는 자야 할 것 같아.
오늘 일도 경식이가 잠이 부족하고 피로가 덜 풀려서 그랬을거야."

아이린 : "생각해보니까 그런 것도 같네."
지혜 : "그럼 이참에 나도 한숨 자야겠다. 헤헤."

아이린 : "그럼 나 혼자 뭐하지?"



나는 이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며 욕실로 가서 양치를 하고 침대에 가서 누웠다. 며칠 동안 잠을 조금씩 자면서 무리를 한 탓인지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이다. 나는 누우면서 경식이에게 옆에 있는 빈 침대를 가리키며 한마디 했다.



"경식이는 자려면 여기 이 침대에서 자라."
"안돼요. 우리 아들 오늘 죽으려다 살았는데 .. 내가 안고 재워줄꺼야."

"엄마! 내가 애기야? 뭘 안고 재워?"
"엄마랑 경식이 올라가. 새벽에처럼 내가 저기서 잘께."

"누나는 다 큰 여자가 어딜 형 옆에서 자려고 해?"

"너 말조심해.
오빠 옆에서가 아니고, 오빠 옆에 있는 침대에서야.
남들이 들으면 완전 오해하겠네."

"그거나 그거나."
"요게! .. 아까도 봐주니까."

"아니야. 누나 말이 맞아."



나는 이들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어? 형 벌써 잠들었다."

"오빠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잠이야.
이제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껄."



내가 자는 것에 대하여 지혜는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다.
쪼끄만게 나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지혜가 한 이 말이 내가 잠들기 전에 들은 마지막 말인 것 같다.


한참 자다가 옆에 있는 침대에서 누가 자고 있을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경식이가 자고 있다. 지혜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나는 우선은 안심했지만, 왠지 서운했다.

나는 전화기를 열어보았다. 부재중 전화나 문자메시지가 있었지만 전부 무시하고 카톡을 열었다. 지혜가 보낸 카톡이 있다.



"나 엄마랑 잘꺼니까 경식이 덮치지 마. ㅋㅋ"



아이린도 나에게 카톡을 보냈다.



"자고 일어나서 올라오세요."



나는 샤워를 하고, 외출복을 입은 후에 아이린에게 올라갔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서서 보니까 침대에는 지혜가 자고 있고, 아이린은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아이린은 나를 보고 반기면서 냉커피를 가져왔다.



"자기한테 할 말이 있는데, 미안하기도 하고 .."
"무슨 일인데?"

"자기야. 오늘 지혜 아빠 만나볼래?"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만나?"

"아까 지혜가 아빠한테 전화했어.
자기가 경식이 살려낸 얘기를 했거든.
그랬더니 경식이한테 그런 일이 있었느냐면서 애아빠가 당장 내려오겠대.
이번에는 자기도 꼭 만나고 싶다는데. 어떻하지?"


"언제 오시는데요?"
"6시쯤이면 도착한다는데."

"그럼 만나면 되지. 나는 또 무슨 큰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엄청 긴장했네."
"자기가 지혜 아빠를 만나는 일은 ... 나한테는 엄청 큰 일이거든요."

"누나도 참 ..."



그런데 나도 솔직히 말하면 지혜 아빠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6시이면 그를 만날 때까지는 두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지혜가 일어나서 우리에게로 왔다.



" 나 빼고 둘이 무슨 밀당질이셔?"
"아빠 온다는 얘기 하느라고."

"아빠는. .. 경식이 보러 오는 거겠지 뭐.
하던 일을 팽개치고 설마 날 보러 오기야 하겠어?"

"아빠가 지혜를 얼마나 예뻐하는데?
방금 그 말 아빠가 들으면 참 좋다고 하겠다."

"몰라. 그럼 엄마가 아빠한테 전해주든가.
어쨌든 아빠는 경식이랑 엄마가 알아서 해.
오빠, 우리는 나가서 바다구경이나 하자."

"지혜랑 나가보세요. 이따가 애들 아빠 도착하면 연락드릴께요."

"엄마, 카드나 주세요."
"카드? 무슨 카드?"

"아빠가 이번 휴가 때 쓰라고 카드 줬다며?"
"그걸 왜 달래?"

"그럼 오빠랑 나랑 빈손으로 나가서 뭘 하라고?"
"참나. .."

"이걸로 한 이백만원 정도 지를꺼야. 이 카드 한도 얼마야?"
"뭐라고? 이백만원? 너 지금 제정신이야?"

"그럼, 싸구려로 놀 수는 없잖아? 오빠, 우리 가자."



나는 지혜와 함께 호텔을 나섰다. 지혜는 몇걸음 앞서서 걷는다. 초록색 핫팬츠는 짧아도 너무 짧다. 하아얀 허벅지 위쪽에서 도톰하게 부풀어 오르는 엉덩이의 아래 부분이 살짝 드러날 때면, 보고 있는 내 심장이 멎는 기분이다. 저 핫팬츠에는 바느질이 엄청 튼튼하게 되어있는 것 같다. 안그러면 저 빵빵한 엉덩이가 실룩거리면서 금방이라도 바느질선을 터뜨릴 것 같기 때문이다.

밝은 바다색 티셔츠는 골반까지 내려오면서 지혜의 허리 아래에서 엉덩이가 시작되는 곳을 잠깐 동안 보여준다. 주욱 뻗어 내린 두 다리는 보기만 해도 시원한 느낌이 든다. 아이린은 지혜에게 어떤 유전자를 물려주었기에 애가 저 모양일까?

그런데 지금 지혜가 나를 앞서서 걷는 이유가 뭘까? 아마도 나에게 뒤태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일부러 천천히 걸으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마음 놓고 감상하고 있었다. 어느새 내 머리 속에는 음란한 생각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한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늘 하는 생각을 또 띄워올렸다.



"쟤는 고2야. 어린애이고 귀에 피도 마르지 않았어. 제발 정신 좀 차리자."



지혜는 돌아서서 나를 보고 멈춰 서있다.



"오빠!"
"어?"

"도대체 내가 걸어갈 수가 없다. 오늘 왜이래?"
"내가 뭘 어쨌다고?"

"그 음란한 눈길 때문이야 ..."
"그러는 지혜 뒤태는?"

"당연히 예쁘지."
"색기만 좔좔 하구만."

"나한테 색기가? 오빠 진짜야? 오빠 혹시 원조해?"
"뭐야? 원조? 요게 정말 못하는 소리가 없네."

"오빠는 나한테 할 소리 안할 소리 다하면서?"
"난 별로 말한 것도 없는데?"

"어쭈? 콱! .. 근데, 정말 예쁘긴 예뻤어?"
"응. 미치겠더라."

"예뻐야 하는 것은 나의 몫이고, 고통은 그대의 몫이니라. 하하."



지혜는 또 나에게 팔짱을 낀다. 쪼끄만 게 내 팔은 마치 자기 전용으로 안다. 그런데 이렇게 지혜가 내 팔에 팔짱 끼는 것을 어느새 나도 좋아하게 되었다. 그것은 지혜가 어김없이 가슴을 내 팔에 대고 지긋이 눌러오기 때문이고, 또 그 때 느껴지는 뭉클함 때문에 내 몸으로 짜릿한 느낌이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차를 타고 가자고 했으나, 지혜는 싫다고 했다. 지혜는 바닷가 쪽으로가 아니라 롯데백화점으로 가자고 했다.




"운전하는 오빠 옆에 앉아서 멍때리는 것보다 이렇게 걸어가는 것이 훨씬 좋아."



지혜는 우선 여름용 원피스를 사겠다고 하면서 숙녀복 매장으로 갔다. 여러 가지 옷들을 보면서 고민하더니, 하얀 바탕에 크고 작은 동그라미가 여러 가지 색으로 채워져있는 칼라풀한 원피스를 입어보고 마음에 들어했다. 지혜 옆에서 옷을 권하던 여직원도 잘 맞는 옷을 골랐다며 지혜에게 칭찬을 한다.



"생각 같아서는 전부 다 사고 싶은데, 그러면 세계 대전이 일어나겠지? 하하."

"고객님은 몸매가 워낙 좋아서 웬만한 옷은 무난하게 소화하셔요. 이 옷이 최고로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얼굴은 워낙 동안이시니까 화장만 약간 하시면 ..."



그런데 지혜는 그 여직원과 약간 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한참 동안을 수근거리면서 이야기했다. 제법 심각한 분위기이다. 두 여자는 이야기하면서 자꾸 나를 힐끔거린다. 그 여직원은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기까지 한다. 여직원도 곱상하고 예쁘장하지만, 지혜를 따라오려면 아직 멀은 것 같다.

지혜는 계산대로 가서 계산을 했다. 그리고 나서 또 피팅룸으로 들어가더니, 입고 온 옷은 종이팩에 담고, 그 원피스를 입고 나온다. 야구모자도 팩에 담은 것 같다. 지혜 말대로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지혜는 완전 여신이다. 오히려 지혜 옆에 있는 내 모습이 후줄근한 것 같다.

지혜의 몸은 약간씩 덜 자란 부분을 제외하고는 아이린의 몸과 거의 비슷하다.

잘록한 허리.
둥그렇게 퍼지면서 통통하게 약간 솟아오른 엉덩이.
가슴이라고 엉덩이와 다르지 않다.


내 옆에 서있는 이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이 지금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라는 것을 누가 믿을까? 내가 그렇다고 진실을 말하면, 모두 날보고 미친 놈이라고 할 것이다.

그 다음에 지혜는 나를 데리고 남자 옷을 고르러 간다고 했다.



"설마 .. 지금 너 ... 혹시 내 옷?"
"그럼 혹시 경식이 옷? 하하하."

"야아아. 도대체 뭣에 씌였길래 네가 내 옷을 사는데?"

"우리 아빠, ... 제일 그룹 서영환 전무야.
오늘 저녁에 오빠가 아빠를 처음으로 만날꺼잖아?
오빠도 신경 좀 써야 하거든요?"

"이거 다 이번 여름에 새로 산 옷인데?"

"누가 뭐래?
오빠, 그치만 생각좀 해봐.
우리 아빠가 대학생이야?
그런 옷은 대학생들이 학교에 공부하러 갈 때 입는 옷이니까 걍 패스하자고.
우리 아빠는 명품으로 엄청 잘 빼 입거든.
우리 아빠를 처음으로 만나는데 오빠가 그런 옷 입는 것 .. 난 싫어."

"옷이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래잖아?"

"오빠. 오늘 우리 아빠 만날 생각은 있지?
그럼 내가 하라는 대로 하실래요?
내가 오빠한테 한마디 충고를 하자면,
옷은 만나는 상대방에 맞춰서 입지 않으면 그것도 결례야. 알아?"



쪼끄만게 어디서 그런 것까지 주워들었을까?
지혜는 나를 데리고 가다가 슈트를 입은 마네킹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한바퀴 주욱 둘러본다.



"오빠, 여기가 이 정도 되면 함 골라보자."
"이 더운 여름에 무슨 이런 옷을?"

"오빠. 오늘 저녁에 딱 한번만 입어.
그 다음에는 오빠가 계속해서 입든, 아니면 버리든, 난 상관 안할께."

"야아아! 딱 한번 입겠다고 이 돈을 들인다고?"



가격표에 적혀있는 것은 모조리 상상을 초월한 4차원적 넘사벽인 숫자들이다. 지혜는 내 말은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혼자 열심히 생각을 하면서 이 옷 저 옷을 만지작거린다. 남자 직원 한명이 지혜에게로 다가왔다. 지혜는 그 직원에게 말했다.



"제 남편이 잠시 후에 업무상 중요한 자리에 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입으면 될까요?"



쪼끄만게 엄청 또박또박 진지하게 이야기를 한다. 남자 직원은 나를 꼼꼼히 보고 나서, 지혜를 데리고 훨씬 더 안쪽으로 간다. 나도 그들을 따라갔다.




"남편께서는 기본 체격이 훌륭하시고, 또 마스크가 깨끗하면서 훤칠하시기 때문에 ...
짙은 회색이나 어두운 청색으로 .. 음 ...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그는 지혜 앞에 슈트 몇벌을 꺼내서 걸었다. 지혜는 그 중에서 두 벌을 골랐다.


지혜는 나에게 한벌을 주고, 나를 피팅룸 안으로 밀어 넣는다. 짙은 회색 슈트이다. 내가 밖으로 나서자 지혜가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남자 직원도 지혜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누구 신랑인지 참 자아알 생겼다. 하하"
“모델 하셔도 되겠어요. 하하.”



내가 언제부터 지혜의 신랑일까?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말을 지혜는 왜 거리낌없이 하는 걸까? 두번째 옷은 검정색인지 헷갈릴 정도의 짙은 바다색이다. 나를 전신거울 앞에 세워놓고 지혜는 고민하다가 남자 직원에게 물었다.



"전문가님께서 보시기에는 뭐가 좋을까요?"
"저는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의 뛰어난 상술에 지혜는 여지없이 말려들었다. 지혜는 두벌 모두 계산했으니까. 지혜는 흰색과 그리고 옅은 하늘색 빛이 감도는 와이셔츠도 두장씩 같이 달라고 했다.

지혜는 그 옷과 함께 나를 피팅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지혜가 하라는 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내가 두 손가락으로 브이(V) 자를 만들어서 흔들며 피팅룸을 나서자, 지혜는 나를 향하여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마주 흔들어준다.

지혜는 나를 전신 거울 앞으로 세워놓고 내 옆에 서서 팔짱을 낀다. 갑자기 우리 둘은 엄청 조신한 커플로 변해있다. 거울에 비친 우리 둘의 모습은 정말 잘 어울리는 부부이다. 지혜는 내 귀 가까이에 입을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 둘이 이 정도 비쥬얼이면 서전무 앞에서도 기 죽을 일은 없을 거야."
"나, 아직까지 살면서 기죽어본 일은 한번도 없거든."

"오빠, 그건 오빠가 다니는 대한대라는 학교 때문이야.
그런데 오늘의 문제는, 우리 아빠가 미국 프린스턴 출신이라는 거야. 정신 바짝 차려."

“학교가 무슨 상관인데?”
“그건 오빠 생각이고.”



이제 지혜는 마음 먹은 것을 모두 다 했다는 듯이 엄청 만족스런 표정이다. 지혜가 계산을 끝내고, 나는 그 옷을 그대로 입고, 우리는 우아한 한쌍의 부부가 되어 호텔로 돌아왔다.



"오빠가 많이 불편하겠지만, 딱 오늘 저녁만이야. 알았죠? 내가 오빠한테 부탁할께."
"나는 내가 왜 이래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나 때문이야.
나 .. 오빠를 아무 남자 중에 하나라고 아빠한테 내보이기 싫어.
나는 엄청 고민하면서 오빠를 골랐거든."



우리는 호텔로 돌아와서 내 방으로 갔다. 지혜는 아이린에게 전화했다.



"엄마, 우리 오빠방이거든요. 지금 냉커피 갖고 내려올래?"



지혜는 내 팔에 팔짱을 끼고, 우리 둘은 문 앞에 서서 아이린을 기다렸다. 내 가슴이 엄청 두근거린다. 지혜라고 다를까?

아이린이 들어설 때, 지혜는 나랑 같이 완전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면서, 나와 같이 연습을 했다.


드디어 아이린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그녀는 바로 우리 둘을 보았다.

아이린은 말쑥하게 뽑아입은 나와, 내게 팔짱을 끼고 서있는 원피스를 입은 우아한 여인 지혜를 본 것이다.


우리는 연습한 대로 허리를 약간 굽혀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아이린의 두 눈은 동그래지고, 아이린의 열린 입은 한동안 닫힐 줄을 모른다.



"사모님, 어서 오십시오."
"아니.. 이 .. 이 .."

"엄마, 왜? 우리 많이 이상해?"

"이상하긴?
이래놓고 보니까 내 딸 지혜가 너무 잘 컸잖아?
그 옆에 있는 태현씨는 또 어떻고?
이건 뭐 .. 잘생겨도 보통 잘생긴 것이 아니라서 .."

"그니까, 엄마 안구정화 좀 하시라고.
안티에이징에 딱이랜다.
엄마, 그런데, 우리 어때? 우리 둘이 잘 어울려?"

"어울리기만 해? 완전 선남선녀 한쌍이다."

"엄마, 고마워."
"고맙긴? 내가 고맙지. 나는 미처 생각도 못했는데 .."

"엄마 걱정 마. 이 정도로 사는데 200만원을 다 못채웠어. 하하."
"너도 걱정 마. 나중에 우리 같이 나가서 마저 질러서, 오백 정도는 채우자. 하하하."



아이린은 침실로 가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



"지혜야. 아빠 로비래."
"그래? 우리 내려간다고, 옆에 카페에서 기다리라고 해."



지혜는 아이린과 경식이를 먼저 내려가게 했다.



"여신은 아직 30분 정도 시간이 필요해."





=*=*=*=*=*=*=




알맹이 없이 너무 길죠?
죄송요.


-Ja"d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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