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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고생의 로망은 역시 친구 엄마 - 18부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2 00:21 1,687회 0건
18부





현준은 주원을 마주 보고 널찍한 공터 한가운데에 서있다.
잠시 이어지는 짧고도 긴 침묵의 시간.
막상 이 자리에 오게 되니 생각보다 긴장되고 조금 떨린다.
스윽- 옷 매무새를 정돈하고 몸을 가다듬는다.




영애와 만나기 하루 전의 화요일.
그러니까 수경이 오랜만에 현준에게 말을 걸었던 바로 그 날이다.
점심시간. 빵과 우유로 대강 때우고, 녹색 나무가 빽빽이 우거진 수풀 사이에 드러누워있다.
날씨 좋구나- 손깍지를 끼고 맑고 쾌청한 하늘을 바라본다.
평안한 기분을 맛보며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그때..




헐? 저 멀리서부터, 자신을 발견하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주원이 보였다.
저 걸어오는 폼새와 눈빛이 어째- 우연히 지나가다 본 것이 아니라..
일부러 작정하고 눈에 불키고 찾아 헤메던 느낌 같다.
이 자식이 드디어 뭔가 한껀 하려나본데..?
현준도 가만히 드러누워 있을 수 없어서 벌떡 일어났다.




“여~ 오랜만이다?”
“오랜만이긴 개뿔- 가끔 교실에서 보는 사인데”
“클클.. 틀린 얘기는 아니네.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다”
“할 얘기라.. 어디 한번 해봐”



주원은 현준에게 예상외로 거칠게 대하지 않고, 느릿 느릿 말투로 조용히 접근한다.
그렇지만 현준은 이 녀석의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본능적으로 느껴져서,
지난번처럼 우습게 보고 허투루 대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여차하면 주먹이 날아올 것을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주원은 지금은 정말 싸울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너, 내가 열 여덟살이라고 한 거 기억하고 있지?”
“그런 말 했나? 글쎄다- 잘 기억이 안나는데”
“큭- 화장실에서 내가 실컷 떠들었는데 귓등으로도 안 들었나보군”
“흐흐, 그때는 들을 가치가 없는 말들이라 신경을 안썼거든.
아, 오해하지마, 기분 나쁘란 말은 아니니까”
“....알고 있어. 그때는 내가 생각해도 심했으니까, 귀에 들어왔을 리가 없지”




둘은 의외로 가시돋힌 말을 슬쩍 피해가면서, 가벼운 신경전만 벌이는 말투다.
현준도 녀석이 차분하게 말할 줄은 생각 못했지만-
일부러 자극적인 말로 성질을 돋울 필요는 없었다.



“암튼 난 그렇다구. 1학년때 사람 뚜드려 패서 정학먹고 1년 학교를 꿇었지”
“그랬구만... 니 얼굴이 어려보이는 얼굴은 절대 아니야. 크캬캬”
“-_- 지금 붙자는 거냐... 그래서 내가 하자는 말은 이 새끼야,
나는 니들보다 한 살이 많은 형이라 이거야. 알겠냐? 겁 없는 애송아”
“애송이? 슬슬 거칠게 나오네- 나도 예전에 한 짓이 있어서 가만히 있으려고 했더니”



잔디밭에 앉아 있던 현준이 슬쩍 몸을 일으켜 세우자,
주원은 자기도 모르게 흠칫- 긴장하여 뒷걸음질 친다.
실컷 이놈만을 조지기 위해서 그렇게 맹훈련을 했는데..
전에 당한 적이 있어서 본능적으로 현준의 위세를 보자,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새꺄! 너만 꿇은 줄 알아?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나도 마찬가지다”
“뭐? 너도 열 여덟이냐, 그럼?? 설마”
“훗- 너같은 놈이랑 겹쳐도 이런 우연으로 겹치게 되냐. 큭큭큭, 노땅 둘이서-”
“이, 이 새끼 너 구라치는 거면 죽어! 어디- 학생증 까봐”
“학생증이 뭐야 이 병신아. 나는 민증도 있는데, 니는 아직인가부지?”



“뭐? 주민등록증이 있어? 이 새끼가 어디서 구라를 쳐.. 어디 함 봐..”
“내가 왜 너한테 쯩을 까냐~ 뭐가 아쉬워서? 믿든 말든 네 맘이야. 정 보고 싶으면 니가 먼저 까”
“-_- 내가... 보여주면 너도 까는 거야”
“큭큭, 그래 씨발- 약속은 지키마”



주원의 학생증은 역시나- 이게 고2 또래가 맞는지, 상당히 구겨진 인상이 으스스하다.
현준은 피식, 웃으면서 약속대로 지갑을 꺼내어 민증을 들어 보였다.
물론 건네주지는 않고- 약간 멀리서 잘 보이도록 주원의 눈 앞에 들이민다.
주원은 눈이 동그랗게 커지면서,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였다.




“진짜네 쓰벌... 너 열아홉이었어? 씨발, 나보다 형이야 그럼??”
“나 참, 이런 넘한테 쯩까지 보여줄 필요가 있나. 내가 생각해도 너무~ 자상허네~ 클클”
“......어쩐지 보통 쳐삭은게 아니더니.. 존니 아저씨 같이 생겨갖구”
“뭐 임마? 너 지금 뭐라고 씨부렸어?”
“클클클클- 왜 꼽냐. 아 아, 진정하라구, 여기서 싸울 생각은 없으니까.
내가 지금 널 찾으러 온건- 격투 제의를 하려고 온거다”



“한 판 붙자고? 드디어 올 것이 왔구만.. 흐흐흐”
“금요일날 성내 1동 하니공원으로 나와. 시간은 이르면 좋다. 너한테 선택권을 주지”
“이게 미쳤나... 씨밸놈아, 금요일에 학교는 안오냐?
너야 막나가는 새끼지만 나는 맘 잡고 수업 착실히 듣기로 했다구.
그리고- 니 멋대로 장소랑 시간을 정하는 법이 어딨어? 토요일로 하면 되지”



“-.- 더럽게 지랄하네.. 그러믄 니가 직접 정해, 씨발! 내가 맞출테니까.
그리고 토요일은.. 에헴, 미, 미안한데.. 내가 체육관 가야되서 그런다..”
“아 체육관! 아 그래 씨발, 그 같잖은 권투랍시고 다니는거 말이구만. 아직도 다니냐?”
“이게 씁.... 좋게 좋게 말하는데 나는.. 끝끝내 싸움거네 자꾸. 여기서 죽어볼겨?”
“크크크. 조까. 칠 수 있으면 쳐봐. 여기서 쌈나면 바로 위에가 교무실인데,
나는 뭐 아쉬울 거 없어~~ 크크크. 뭐 그건 그렇고, 흠....”



현준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부르르- 분노로 떨면서 벌개진 주원을 보고 말했다.



“좋아. 니가 도전하러 왔으니, 그 용기가 가상하구나. 금요일날 붙자!
천호동 성심병원 알지? 우리 집이 그쪽이니까, 정 붙고 싶으면 글루 와. 아침 열시에”
“성심병원 오케이.. 씨발, 우리 집에서 가까운데 사는구만.. 재수없게. 알았어”
“키키키, 볼일 봤으면 가봐”



분노를 가볍게 억누르며 참을 인을 새기고 있는 주원-
아무렇지도 않게 그놈을 돌려보내긴 했지만 현준도 사실 걱정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금요일이라, 3일 남았군... 저거 몸통이 전하고는 확실히 다른데 운동 겁나게 했을 듯..
나도 열심히 3일만이라도 체력 단련 좀 해둬야겠구나.




그리고 영애와의 데이트 후 이틀이 지난 당일.
한림대학교 강동성심병원 앞에서 바짝 긴장한 채 현준을 기다리는 주원이다.
검은색 통 넓은 츄리닝 반바지에 어울리지 않는 ‘밝은 노란색’ 반팔 남방을 걸쳤다.
멀리서부터 블루 스키니진과 하얀색 반팔티를 입은 현준이 그걸 보고,
질색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옆에 있던 전봇대 뒤로 숨는다.




아 쪽팔려!!...... 저 문어대가리 새끼는 패션 감각이라는 게 아예 없나???
노랸 샤쓰에... 검은색 바지를 입을라믄 긴거나 입지, 무릎까지 다 드러나는 반바지라니? -_-
지저분해보이는 털복숭이 다리는 누구 보여줄라고 환하게 까놓고 (...)
쳇, 현준은 주원의 구린 센스를 투덜거리며 나타난다.



“따라와, 여기서는 말고, 내가 아는 공터가 있으니까 가자”
“일찍 왔네. 나 존나 배고프니까, 후딱 끝내자구”
“큭큭, 옘병허네.. 그럼 적당히 배를 채우고 올 것이지”



주원은 깔끔한 사복차림의 현준을 보자- 의외로 샤프한 그 모습에 눈길을 고정했다.
학교에서 다 똑같은 교복만 보다가, 훤칠한 체형의 그 스타일을 보자 같은 남자지만 시선이 간다.
나는 이렇게 편하게 입었는데.. 이 자식은 누구 만나러 가나?
주원은 현준의 뒤를 따라, 그가 말한 공터에 다다랐다.
오~ 이런 데가 있어?
주변을 둘러보니, 예식장 건물과 오피스텔 한 채, 그리고 멀리 중학교 건물도 보인다.




현준과 주원은 널-찍한 공터 한 가운데에 나란히 마주 섰다.
주변은 문자 그대로 허허벌판이다.
공사가 진행중인 신축부지인 모양인데, 어떤 사정으로 현재 공사가 중단된 느낌이다.
바닥은 온통 쓰다 남긴 철근과 콘크리트, 그리고 각종 부산물과, 시멘트에 모래 투성이었다.
긴장된 두 사람은 서로를 잠시 노려보며 말이 없다.
주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은 맞짱뜨기 전에, 약속한 대로 제 시간에 나와준 거에 대해서 고맙다”
“......고마울 것까지.. 뭐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머쓱하네. 나도 고맙다”
“클클- 붙기 전에 미리 말하고 싶은게 있어.
누가 이기냐에 따라 조건을 걸자”
“조건이라? 좋지! 니가 아무 계산없이 싸우자고 하진 않을 거 같았거든”
“별 거 없어. 지는 사람은 승자의 꼬붕이 되는 거야. 이기는 그 순간부터”



“하, 이놈 봐라. 꼬붕이라니.. 너 그 말 지킬 자신 있냐?”
“크크크, 자신 없는 놈이 이런 말을 하나? 내가 혹시라도 지면 니 말대로 무조건 따른다”
“어쭈- 제법 개폼을 잡네... 어디서 조폭 영화같은 걸 많이 봤구만..
콜! 받아들인다. 나중에 지면 딴소리 하기 없는 겨!”




그렇게 정해놓고, 둘은 드디어 서서히 가까워지며 탐색전을 벌인다.
주원이고 현준이고, 둘 다 잔뜩 긴장해서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서로의 기색을 살핀다.
선뜻 선공을 날리지 못하고-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눈치를 보는 두 사람.
나이로는 고등학생 둘인데, 마치 어른의 결투를 앞두고 있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주원이 먼저 “하아앗-!!” 크게 소릴 지르며 다다다- 뛰어오는 동시에 오른 주먹을 뻗는다.
상당히 빠르고 위협적이다. 현준은 그 주먹이 다가오는 기세와 츠팟-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생생하게 들었다. 이거, 맞으면 골로 가겠는데...
그래도 이 정돈 우습지, 피식 웃으며 현준은 가볍게 몸을 왼쪽으로 피한다.
어 그런데..?



현준의 회피 동작을 미리 예상하고 있던 주원은, 씨익-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자기 오른쪽으로 어깨가 빠진 현준의 오른쪽 얼굴을 향해-
방금전 오른 주먹을 지르자마자, 연이어 왼쪽 주먹으로 재빠르게 연타한다.



크지 않은 작은 반경 내에서, 가볍게 원을 그리면서 반동을 이용해
사-사-삭-!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주먹...
현준으로서도 오른 펀치를 날리자마자, 순식간에 왼주먹이 날아올 줄은 예상 못했다.
퍼엉-!! 꼼짝 못하고 기습 펀치에 오른 얼굴을 얻어 맞는다.



큭... 뭐야 이 빠른 동작은?
단순한 돼지인줄 알았더니... 현준은 살짝 비틀거리며, 망설임 없이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주원은 멋지게 선빵을 먹인후, 의기양양한 미소로- 쫓아오지 않고 그 자리에 서있다.
바로 연달아 치면 되는데, 너도 올테면 와라- 하는 얼굴로 공격하지 않는다.



“...빠른데.. ?-!!”
살짝 터진 입가의 작은 핏덩어리를 뱉어낸다.
한 대 얻어 맞고 나자, 부릅 뜬 두 눈은 독기를 품은 살벌한 눈빛을 띄었다.
주원은 자신만만하다가, 현준의 그 매서운 눈빛을 보고 순간, 잠시 움찔-한다.



현준이 이번엔 소리없이 근접하며, 주원의 얼굴을 왼쪽 주먹으로 힘있게 강타한다.
퍼벅! 퍼벅! 퍼버벅!!
성난 현준의 날렵한 주먹이, 세 네 차례 주원의 안면을 두들겼다.
그런데, 주원은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두 팔을 들어 가드로 막아낸다.
주원보다는 파워가 약간 떨어지지만, 현준의 육중한 힘이 실린 펀치도 상당히 강해서
주원은 욱씬 욱씬- 방금 가드로 막았지만, 팔꿈치가 찌르르 울렸다.



고작 이거야? 가소롭다는 눈빛을 지으며 주원이 슬쩍, 뒤로 물러나- 주먹을 날릴 준비를 한다.
헉, 그런데..
연거푸 주먹공격을 붓고 나서, 주원이 뒤로 몸을 1초 남짓 젖혔을 뿐인데..
현준의 긴 오른 다리가 번개같이-! 주원의 무방비인 복부를 콰앙-! 걷어찼다.
.................
주원은 순간 눈알이 앞으로 쭈욱~ 튀어나올 정도로 강한 데미지를 받았다.
다리에 힘이 쭈르르- 풀려서, 자리에 주저 앉을 뻔한 걸 일단 간신히 버틴다.




“하아... 하아...”
“후흐, 어때, 배를 맞으니까 정신 번쩍 들지? 까짓거 한 대밖에 안맞았다고 서로, 덤벼!”
“발을 잘 쓰는군. 엄청나게 빨라.. 크큭, 과연- 나보다는 리치가 길어서 유리해...”
“씨발 돼지새끼가 잔말이 많네 그것참”



현준은 여세를 몰아, 배를 얻어 맞고 숨이 차는 주원의 얼굴을 또다시 때린다.
주원의 가드가 이번에도 얼굴을 보호하긴 했는데, 조금 전의 충격으로 그 막는 팔에
조금 힘이 빠져있다. 그 작은 틈을 현준은 놓치지 않는다.
막긴 뭘 막어, 이 병신아? 현준은 막든 말든 그대로 따다다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연타로 주원의 얼굴을 두들겼다.



이쯤되자, 방어에 일가견이 있는 주원도- 두 막고 있는 팔에 점점 상처가 나며 부르르.. 떨린다.
그래도 얼굴은 용케 잘 사수하고 있다... 반격의 기회만 엿보는 모습으로.
그러자 현준은 슬쩍- 뒤로 한걸음 작은 보폭으로 잽싸게 물러섰다가,
주원에게 빈틈이 생기는 순간, 이번엔 왼발로-
다시 한번 아까 때렸던 주원의 복부 오른쪽, 허리부분을 거세게 퍼억!!! 빠르게 걷어찬다.
커헉.... 오른 발이 아니고 이번은 왼발?



주원은 허리를 제대로 얻어맞고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진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복부에 피하지방도 넉넉하게 있는 편이고,
그 지방을 모두 제거하진 않았지만, 뱃살 주위를 두텁게 근육으로 둘러 싸놓아서
어지간한 외부 충격으로는 큰 충격을 주지 못한다.
그런데도, 현준의 재빠른 킥 두방은 그에게 상상 이상의 큰 데미지를 주었다.



현준은 이어서 얼굴이 시뻘개진 주원의 상단부를 다시 직격한다.
어어어- 하는 사이에, 이번엔 주원도 팔을 들어올리지 못하고-
빠르게 날아오는 주먹에 퍼억! 퍼억! 얼굴 양쪽을 모두 얻어 맞았다.
맞자마자 금방 새빨개지는 양쪽의 얼굴...
이어서, 무방비상태로 드러난 주원의 남방을 콰악, 현준의 손이 움켜잡는다.



그러더니, 지치지도 않나...
현준의 묵직한 오른 주먹이, 손에 붙들린 주원의 얼굴을
마음 놓고 퍽! 퍽! 퍽! 퍽! 퍽! 미친 듯이 줘패기 시작했다.
상대가 빈틈을 보였을 때는 쉬지 않고 조져야 효율적이다.
현준은 광기어린 미소를 지으며, 순식간에 주원의 퉁퉁 불은 얼굴을 보기 좋게 호떡으로 만든다.
주원은 커헉- 커억-! 쉬지도 못하고 덜컥- 덜컥- 고개가 돌아가며 얻어 터지느라 바쁘다.




씨발, 이제 그만 좀 패...
하는 생각으로, 두 팔로 파아앗-! 있는 힘을 다해 현준에게 잡힌 손을 내치고 물러선다.
하아, 하아...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쉰다.
끕... 마른 호흡을 토하며 잘 넘어가지 않는 침을 삼키려는데,
아 씨발..?!? 현준이 또 다가와, 살짝 아래로 숙여진 주원의 머리통을 양손으로 탁- 붙잡았다.
그리고는... 왼발로 단단히 힘주어 바닥을 딛더니,
안정적인 자세에서, 오른발 무릎으로 냅다- 주원의 복부를 퍼어억!! 찍어 차버렸다.




.................
배만 두 번을 때리다니.. 무지막지한 놈..
주원은 커헉-!! 거친 비명을 토하며 휘청- 휘청- 다리를 비틀거린다.
그와 함께, 주저 앉을 뻔한 걸 부르르..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버텨냈다.
배를 두 번 맞은 것보다, 이쯤 되니 허리 한번 걷어차인 쪽이 더 욱씬거리고 아파온다-
현준도 좀 지쳐서, 하아.. 하아.. 호흡을 고르며 다가오지 않고 서있다.




“어때? 이제 좀 싸울 맛 나나? 돼지새끼 때려잡는 맛이 아주 찰지구만 캬캬캬...”
“하아.. 끄읍.. 아직 끝난게 아니라구.. 젠장할.. 잠, 잠깐만 기다려”
“싸우는 도중에 기다려주는게 어딨어, 씹새야. 후딱 덤벼”
“쿨럭- 제기랄, 아침을 적게 먹고 왔더니... 쓰읍...”



“원래 적게 먹고 오는게 맞아. 이 병신아... 니가 소화가 빠른거고. 그러니까 살이 찌지”
“씨발, 싸우다가 나한테 훈계하는 거야, 지금?”
“크크크, 그런 같잖은 소리 듣기 싫으면 덤벼. 내가 너한테 말 걸면서 시간을 주잖아 지금”
“........알았어, 끄윽- 이제 간다”




주원은 호흡을 가다듬고,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잡는다.
눈빛에 팍- 힘을 주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현준의 빠른 오른 주먹을 왼 팔로 어렵게 막아낸다.
이번엔 빠르게 오른쪽 옆으로 스텝을 사삭- 옮기며, 왼팔로 옆으로 쳐냄과 동시에 튕겨내, 충격을 면했다.
현준은 주원의 방어에 살짝 놀랐다. 그리고 그 순간...
주원은 예의 빠른 연속기로, 약간 주춤한 현준의 틈을 놓치지 않고, 오른 펀치를 들이꽂았다.
퍼억!!!



이번엔 주원의 핵주먹이 현준의 왼쪽 얼굴에 그대로 직격했다.
아까는 오른쪽, 이번엔 왼쪽을 맞고는, 현준도 뒤로 엉거주춤 물러선다.
잠시 벌어진 틈새, 주원은 다시 작은 반경 내에서- 반동을 이용해서
휘이익~! 180도 턴을 그리며, 왼 주먹으로 현준의 얼굴을 강타한다.
퍼버벅!!!



엇, 그런데 이번엔 현준이 재빠르게 오른 팔을 들어 그 짧은 사이 막아냈다.
큭... 주원은 회심의 그 주먹이 막히자, 0. 몇초간 멘붕이 온다..
그걸 때렸으면 이 자식 제대로 뻗는 건데...
헉, 그 불필요한 사색이 또 길었다.
쉬지 않고, 현준의 왼손 펀치가 가볍게 원을 그리며-
휘릭~ 주원의 멍때리던 오른쪽 얼굴을 퍼억!! 다시 갈긴다.



크윽- 잠깐의 방심으로 얼굴을 얻어 맞은 주원의 고개가 뒤로 살짝 꺾여진다.
그 기세 그대로, 현준의 오른발 운동화 밑바닥이 주원의 가슴팍 상단부를,
안정적인 왼발로 바닥을 지지고서, 걷어 차버렸다. 퍼억!!
그 바람에 주원은 몇걸음 간신히 뒤로 타다다다- 추하게 물러나더니 바닥에 탁, 엉덩방아를 찧는다.
엉덩이 제대로 일그러지는 자세로 모래 바닥에 철퍼덕, 주저 앉았다.




“하하~ 너 겨우 이 정도로, 그렇게 자신 만만했냐? 안되지, 이 정도 갖곤~”
“아, 아직 안 끝났어, 씨발!... 흐후, 뭐해? 때릴려면 지금이 찬스인데, 끝장 안내고?”
“흐흐흐, 걱정마라. 기회를 한번은 더 줄게. 안쓰러워서 봐줄 수가 없네”
“.........동정까지 하다니.. 쓰벌.... 젠장...”



주원은 자존심에 상처를 많이 받은 모습이다.
설마 이 키만 멀대같이 큰 녀석이- 양 손, 양 발 모두다 자유롭게 괴물처럼 잘 쓸 줄은 몰랐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지? 고등학생 맞아....
잠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번개같이 휙- 휙- 날아오는데, 막기가 너무 힘들다.



현준의 자비 덕분에 30초 정도 너저분한 엉덩이를 깔고 앉아 호흡을 재정비한 주원.
다시 벌떡, 일어서서 남방의 흐트러진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이야아아-!!” 함성을 지르며 현준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내지른다.
훗, 현준은 비웃을 수 밖에 없다.
학습이 모자라네. 또 얼굴을 때리면 막아내지...



엇? 그런데 보통 빠른 놈이 아니란 걸 그새 잊었다.
주원은 현준의 얼굴 부분에 타점을 두는 척 주먹을 뻗더니,
순식간에 훼이크 펀치를 사삭- 거두고, 허술하게 비어있는 그의 배를 퍼억! 퍼억!!
연달아 두방의 펀치를 먹이고야 만다.
커헉..... 현준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그 두방만으로 부르르.. 몸이 떨렸다.




이게 고등학생의 주먹이야..?!?
잠깐의 방심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현준은 두 손으로 황급히 복부를 감싸고,
재빠른 발을 써서 타다닥-! 주원이 연속기를 먹이지 못하도록 뒤로 후퇴한다.
주원은 회심의 어퍼컷을 먹이려다가, 현준의 빠른 도망으로 기회를 놓쳐버렸다.
하, 씨발 그 놈 다리는 길어서 겁나 빠르네...



현준은 끄읍- 크흑- 끅- 복부를 얻어맞은 충격에 호흡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복부 단련을 허술히 했더니, 배가 많이 약해졌구나.. 젠장...
꿀꺽.... 목젖이 울리도록 바싹 말라버린 침을 삼키고,
배를 감싸던 팔을 내리며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섰다.



이제는 서로 아무 말도 안 한다.
상대적으로 많이 때린 쪽은 분명 현준이지만, 주원은 맷집이 보통 좋은게 아니었다.
그렇게 뚜드려 맞고도, 사나운 잽 두방으로 기세 좋게 리듬을 회복한 것 같다.
현준도 절대 방심할 생각이 없었다. 여차하면, 까딱하는 순간에 골로 가는 거다...



마지막 기회를 엿보며- 아까 초반처럼 서로의 탐색을 하는 두 사람.
몇 초가 지난 뒤, 하아아앗-! 이번엔 현준이 재빠르게 주원의 무릎 위, 허벅지를 가격한다.
뭐야, 무릎을 때려? 주원은 예상 못한 타점에, 어어- 하면서 퍼억! 허벅지를 얻어 맞았다.
배를 때리는 척 해놓고, 순간적으로 아래쪽을 빠르게 걷어찬 느낌이다.
허벅지를 맞으니- 다리에 힘이 더 쫘악, 빠진다.



현준은 달려들면서 주원의 외광근을 파박! 파박! 연달아 두 번 연속 발등으로 찼다.
허벅 다리에 힘이 스르르, 풀려서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든 주원인데
현준은 사삭- 빠르게 오른쪽으로 몸을 비키더니, 그의 허벅지 뒷면 대퇴부 근육을-
있는 힘껏 퍼벅!! 긴 다리 정강이로- 양다리를 한꺼번에 차버렸다.
으으- 도저히 못 참겠다... 주원은 풀썩, 무릎을 꿇고 또다시 주저 앉는다.



한심한 놈.. 현준은 주저 앉은 놈의 멱살을 콱, 쥐고 일으켜 세웠다.
나머지 왼손은 이제 마음 놓고 주원의 오른쪽 얼굴을 파바바밧-!!
수차례에 걸쳐서 흠씬 두들기는 중이다. 주원은 어쩔 방도가 없었다.
빛의 속도로 겁나게 얻어터지는 바람에,
어느새 얼굴이 잘 익은 호떡마냥 퉁퉁 뿔어터져서-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울상이 되었다.




“씨발... 그만 때려....”
“기권이냐? 이제 안 싸울거지?”
“아, 씨발 보면 몰라.. 쿨럭... 내가 졌...”
“뭐래는 거야. 졌, 뭐 말을 안해? 크큭”



졌어, 라고 말을 목구멍 밖으로 내뱉으려다가, 주원은 주먹을 불끈, 다시 말아 쥐었다.
현준이 실실 쪼개며 자신의 멱살을 붙잡고 가지고 노는 모습이 승질이 확 난다.
어디서 그런 힘이 아직도 남아 있었을까?
주원은 현준에게 제대로 틀어쥐인 상태였는데도, 마지막 회심의 힘을 짜내어..
이거나 먹어랏!! 하는 심정으로 현준의 비어 있는 아랫 턱을 올려 쳤다.
퍼억!!!......



현준은 주원의 혼신의 일격에, 자동적으로 그를 잡고 있던 손을 놓치며
파르르.... 떨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뒤로 물러난다.
용케도 쓰러지지는 않고, 다리만 휘청 휘청 거리는 모습이다.
주원은 여세를 몰아, 탁, 빠르게 스탭을 딛으며 현준의 배를 가격한다.
이 씨발, 이게 봐주니까 진짜... 끝을 낼 줄을 모르네.



사실 현준의 방금 전, 희미하게 몸을 떠는 척 하며 뒤로 헛걸음질 친 것은 일종의 페이크였다.
충격을 받긴 받았지만- 그 정도로 허투루하게 100% 펀치 모두를 맞을 녀석이 아니다.
현준은 주원이 주먹을 꽈악 쥐는 걸 보는 순간, 습격을 직감하고,
어퍼컷이 날아오는 동시에- 최대한 빠르게 몸을 뒤틀어서- 데미지를 최소화했던 것이다.
주원은 그랬으면,
어? 어째 때리는 순간의 손맛이 평소보다 덜하다? 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아뿔싸! 현준은 주원이 뛰어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현준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척, 뒤로 슬금 슬금- 물러선 곳은 벽이 있는 막다른 위치였다.
주원은 뭣도 모르고, 현준의 머리통을 갈기려고, 뛰어오면서 주먹을 내지른다.
그런데 그 순간, 현준의 날랜 동작이 좀 더 빨랐다.
앗?!? 하는 사이, 탁- 바닥을 차고 뛰어오른 현준의 다리가...
뒷 쪽에 있던 벽을 터억, 짚는다.



순간적으로 짧은 1초 남짓한 시간이었을까?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준은 주원을 아래에 두고 위에서 내려다 보며..
공중에 1, 2초간 붕~ 떠 있는 모션이 되었다.
빠르게 하늘로 날아오른 현준의 몸을 보고, 주원은 어벙하게- 위를 향해 고개를 쳐든다.
흐흣, 쳐들긴 어딜 쳐봐 짜샤...
현준이 회심의 미소를 씨익- 잔인하게 짓는다.



그와 함께, 잠시 정지해있던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하듯,
벽을 잠시 왼 발로 딛고 있던 현준의 하체가 휘릭- 움직이며-
있는 힘껏, 오른 발 가득 체중이 실린 가위차기로- 주원의 머리통을..
콰아아앙!!!! 걷어 차버렸다.



썸머쏠트킥이란 바로 이런 거다!! 죽어 개새끼야!!
현준은 속으로 외치며 마지막 일격을 먹였다...
맞자마자, 때리는 사람 본인이 안다. 이걸로 끝이다.
주원은 역시나, 코는 물론이고 이마와 뺨이 홍시 터지듯 심한 찰과상을 입었다.
추파하앗-!!!



상당한 양의 뜨거운 피를 분수처럼 내뿜으며.....
그대로 추스스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몇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풀썩, 고꾸라진다.
완전히 뒤로 나자빠져서- 대大자로 뻗어버렸다.
이제야, 기나긴 승부에 끝을 맺은 것이다.



“하아.. 하아.. 애썼다. 이 제육덮밥 같은 놈.... 후우. 후우....”
“...............”
“후, 힘들어, 씨발 돼지놈이 한방에 끝나잖구, 드럽게 명줄도 기네... 헉... 헉...”
“.....쿨럭, 쿨럭...... 쿠흑......”




현준은 숨을 어렵게 고른 후, 척- 다가가 완전히 뻗은 주원의 앞에 선다.
몇 번을 내려다보고 재확인해도, 끝난 상황이 확실하다.
흡사 죽은 것 같기도 하다. 에이, 설마~?
현준은 좀 겁이 나서, 몸을 수그려- 녀석의 희미한 호흡이 들리는지 확인해보았다.
혹시라도 이 미친놈이, 기절한 척 하고 또 일어날까봐, 아주 가까이는 다가가지 않고...



이번은 정말 미동도 하지 않는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죽지는 않았다. 쌔액- 쌔액-
아주 미약하지만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작은 숨소리가 들려온다.
살아 있는 것은 맞는데.... 이대로 놔두고 갔다간, 정말 초상치를 지도 모르겠다.



현준은 주원이 완전히 넉다운 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자빠진 녀석을 슬쩍, 일으켜 세워 들쳐업었다.
진짜 무겁네... 아흐 씨발놈.. 왜 기절은 해서, 나를 이 고생을 시켜...-_-
궁시렁 궁시렁대며, 현준은 기절한 주원을 업고 비틀대는 발걸음을 옮겼다.



-



영애는 아들을 데리러 가는 차 안에서 생각한다.
자기 딴에는 용기내어 현준에게 처음으로 용돈이란 것을 주었는데,
기분 나쁘지 않게 받아들여줘서 다행이라고-
그리고 조심스럽게 주긴 했지만 기왕이면 넉넉하게 줄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마음 같아선 10만원씩도 주고 싶은데, 그러면 자존심 무지 상하겠지..




“여기야! 얘, 영애야”
“아- 거기 앉았구나~!”
“호호, 왜 이리 늦게왔어?”
“미안해 호호호.. 다른 분 잠시 만나고 오느라고.
그리고 우리 말썽쟁이 아들 모셔오느라 좀 바빴네 히힛”
“어, 엄마는 참! ....”



“후후후. 잘생긴 지우 도련님, 안녕? 오랜만에 보네?”
“아, 안녕하세요. 아줌마... 오랜만에 뵈어요”
“욘석, 후후. 너 얼굴 왜 빨개지니? 쿡쿡 웃겨- 유미 보고 가슴이 설레는 거야? 푸하하”
“엄마 제발... 이상한 소리좀 하지마- 씨이...”



“쿠쿠쿠. 그래 얘, 영애 너두 애 그만 놀려. 멋쟁이 지우가 좋아해주면 큰 영광이지~! 후훗.
어떻게 지냈어, 영애야.. 빨리 근황좀 알려줘봐~~”
“훗훗 뭘 그렇게 서둘러. 너 바쁜 일이라도 있니?”
“으응, 곧 누가 여기 오기로 해서 호호...
그전에 우리끼리만 나누고 싶은 얘기들이 있잖니”




영애가 오늘 만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고교시절부터의 오랜 친구- ‘영화배우 정유미’이다.



영애가 편하게 지내는 지인들은 두루 두루 많지만
정말 편안하게 모든 속 이야기를 터놓고 진솔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러하듯이- 극히 소수이다.
19년전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되어 지금까지 좋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현재 영애 주변의 다양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친한 친구들중의 하나.



그 당시에도 남다른 미모가 돋보이는 아름다움을 뽐냈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도.. 마치 세월이 훌쩍 비껴가기라도 한 듯, 근사한 아름다움을 유지한다.
학창시절에는 무척 깍쟁이처럼 굴었고 도도한 컨셉을 즐기는 성향이 있었으나
이제 원숙미가 어느 정도 무르익은 시점에- 그런 쌀쌀맞음은 많이 희석되어 있었다.



“호호호, 맞아 맞아, 참 근데 유미 너,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어제 드라마 보면서. 흐흣”
“킥킥. 드라마? 말해봐”
“후후, 우리는 서로 알잖니, 어릴때는... 브라운관에서나 실제 모습이나
아주 부잣집 공주님같은 고상한 느낌이 짙었는데
요번에 느낀 건데, 연기에도 물이 오르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맛이 느껴지더라. 호호”



“풉- 사람 띄워주는데는 뭐가 있어 너는 히히.
여전히 툴툴거리는 고상한 면도 갖고 있다고, 뭐~ 나는 애써 날 위로하곤 해 호호
연기에 자연스러움이 배어 있다는 말은 최근에 자주 듣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애 네가 해주는 말이, 훨씬 기쁘고 솔직하게 들린다 흐훗”



“있는 그대로 말한건데 모. 호호... 내 친구가 이렇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배우라는게,
볼때마다 얼마나 어깨에 힘이 으쓱! 들어가고 괜히 자랑스러운지 몰라? 킥킥킥”
“야아~ 그만좀 하래두. 지우 앞에서 너무 그러면 꼴사나워.
비즈니스 석은~ 우리끼리 있을때만 적당히 태워주도록해 호호”
“헤헤, 저 괜찮은데요 아줌마. 저희 엄마가 하시는 이야기가 다 저도 맞다고 생각하구요...”



“어머? 지우 너도- 아줌마 나오는 드라마 같은걸 보고 그러니?”
“쿡쿡, 같은거라니, 무슨 말이 그래~ 얼마나 근사한 작품인데..
우리 아들이랑 나랑 드라마 볼 때 옆에 같이 꼭 붙어서 본다구!
킥킥, 요녀석이 나한테 일일연속극 할 시간되면~ 엄마! 왜 빨리 안와~ 난리를 부릴 정도야.
그리고 유미 너 나오는 건 거의 다 봤을걸? ㅋㅋㅋ”




지우는 얼굴이 완전히 홍당무가 되었다.
엄마가 이렇게 야속하고 미울 수가!
동경하고 좋아하는 유미 아줌마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하다니? T.T
이 아줌마는 아들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가 너무 없다 -_-



“.......엄마... 진짜, 이러기야?? 오늘 내가 짜증냈다고, 지금 복수하는 거야? -.-”
“아니~? 그런거 전~혀 아닌데~?
쿳쿳쿳- 엄마는 뒤끝 없는 사람이란다.
호호- 사실을 말한 것 뿐이야 얘, 히히 너 유미 아줌마 나오는 거 잘 챙겨보잖.. 흡!”
“아 진짜.. 그만좀 하라구 좀! 아, 아줌마 죄송해요. 저희 푼수 엄마가 하는 말은
50프로 정도는 말도 안되는 뻥이라고 생각하고, 감안해서 들으시면 돼요. 헤헤-”



“웁, 웁... 푸핫-! 엄마 입을 왜 막아 요놈~”
“아, 아퍼!”
“쿡쿡쿡쿡. 하하하하. 여전히 명랑하구나 너희 모자는 호호호.
보고 있으면 한편의 시트콤을 보는 것 같아. 즐거워. 키키.
사이 좋은 모습이 참 보기 좋아^^”



“그렇지? 이 녀석은 괜히 이럴때만 수줍음이 많아서 이래요- 후훗.
지우야, 원래 아줌마들끼리는 다 이런 얘기 허물없이 하고 그러는 거야~
너 유미 아줌마 좋아하잖니, 후후 부끄러워 하지마. 한두번 본 사이도 아니고”
“그래도 창피한건 창피하잖아... 엄마 미워”
“호호. 아이구 귀여워~ 나두 잘생기고 이쁜 지우가 좋아해주면
얼마나 반갑고 흐뭇한데? 고마워 지우야~ 호호호호”




유미는 지우가 기특하고 귀여워서 쓰슥- 쓰슥-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럴수록, 흠모하는 아줌마의 손길에 점점 더 얼굴이 발개지며 부끄러워하는-
어린 소년의 모습에 점점 더 귀여워서 어루만져주고 싶어진다.
여인은 계속 방긋~ 미소를 지으며 소년의 뺨을 꼬집어 주었다.



“귀여워...♡ 나도 이런 멋지고 이쁜 아들래미 하나 있으면 좋겠어, 영애야”
“풉! 무슨 소리니? 누구나 부러워하는 그런 예쁜 딸을 키우고 있으면서!
나는 오빠랑 알콩달콩 잘 살면서 그렇게 러블리한 아가씨를 잘 키운 너희가 부럽단다~
우리는 아들만 둘이라서 히히~ 이쁜 공주님도 있었으면- 아쉬움이 크다니까”



“-.- 엄마 나 집에 갈거다, 자꾸 나 들으라고 놀리면”
“잉? 너 놀리는거 아니야 지금은- 바보얏. 너도 누나 있으면 좋겠다고 그러잖아? ㅋㅋ”
“아... 장난치는 거 아니었어? 헤헤~ 맞아. 누나 있으면 좋겠어요 아줌마...”
“후후, 지우도 누나나 여동생을 좋아하는구나? 여자 형제가 있으면 좋겠니?”



“네... 엄마랑 가끔 그런 얘기해요.
음- 나는 엄마랑 다르게 통이 큰 남자라~ 엄마 띄워준다!
하하- 우리 엄마는요, 얼굴이 아주 예뻐서, 딸을 낳았더라도...
되게 이뻤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헤헤~”
“아휴, 너야말로 참, 우리끼리 있을 때 하던 얘기를. 오호호호...”



영애는 탁! 탁-! 은근히 세게 아들의 어깨를 치며 (두드리는게 아니고...)
내심 기분 좋은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유미도 지우가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에, 쿡쿡 재밌어서 웃는 표정이다.
그러더니 급 생각난게 있는지, 엄지와 중지를 따악! 부딪쳐 소리내며 말했다.



“맞아, 내 정신 좀봐...
안그래도 여기로 지금 오기로 했는데, 얘가 왜 소식이 없지?”
“누구? 누가 올 사람이 있니?”
“응, 나은이! 너희 얘기 들으니까 또 생각났네. 오늘 영애 아줌마 볼거니까 가자고 그랬지”
“아... 정말? 나은이는 뭐라고 그래, 오겠다니?”
“그럼! 후후후~ 니 이야기 하니까 반색을 하고 아주 좋아하던데? 쿠쿠”




헉.... 그런데 지우는 난감한 흙빛 얼굴이 된다.
나은이 누나? 오늘 여기에 온다고...?
뭐야, 엄마는 사전에 예고도 없이!!
유미 아줌마를 만나는 건 알고 왔지만, 그 딸까지 동석할줄은 상상도 못했다.



유미는 일찍이 배우생활을 시작하면서, 영화 첫 데뷔작의 감독이었던 남자와 결혼하였다.
딸 하나를 두고 있다. 딸의 이름은 주나은.
올해 고등학교 3학년으로 19세다.
엄마와 아빠의 우수한 고급 DNA를 물려받아, 아름다운 자태의 미소녀로 무럭 무럭 자라났다.



늘씬한 큰 키에, 쭉쭉빵빵 잘 빠진 몸매가 섹시하며 또 상큼한 매력을 뽐낸다.
아마도 샤프한 미모하며, 학교에서 인기 꽤나 끌 것이 틀림없다.
단..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무난하다는 전제라면..



그런데 지우가 지금 나은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싹, 움츠러든 이유는...?
엄마들끼리는 잘 모르는 비밀이지만- 나은만 보면 자기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버렸고,
알 수 없는 그 아이의 차가운 기세에 짓눌리고는 했던 것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나은은 몸매, 얼굴 모두 나무랄데 없이 훌륭한 아이지만, 속된 말로 좀 싸가지가 없어서 (...)
반듯하니 예쁜 얼굴로- 어지간한 남자들은 우습게 보고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다.
지우를 몇 번 만나는 자리에서도 차갑게 무게를 잡으며 겁을 준다거나
괜히 심술을 부리며, 어린 동생에게 무안을 주는 행동도 서슴치 않는다.



지난번에도 괜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 면전에서 얼마나 진땀을 흘렸더냐.
그런 못된 나은이니까- 지우가 이름만 들어도 등골이 오싹해질 법도 하다.
젠장! 오늘 괜히 나왔네, 마귀같은 가스나 오는 줄 알았으면 올 생각도 안할텐데...
설마... 엄마가 일부러 날 골탕먹이려고 말도 안하고? -.-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슈밤, 어떻게 여기를 탈출하지? 하는 생각중인데...
오 마이 갓-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
어서오세요~ 인사소리가 들리자 지우는 혹시.. 하는 맘에 뒤를 돌아 보았고
타박 타박, 지친 발걸음으로 나은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 얼른와~ 한참 기다렸잖아. 이쁜 공주님 호호호”
“안녕 나은아~♡ 호호. 잘 지냈어? 우리 한달만에 보는 거 같네”
“앗, 아줌마 안녕하세요^^ 후훗... 저 아주머니 보려고 일부러 왔어요”
“얘는 엄마는 아주 투명인간 만드네 키키. 아, 지우한테도 인사해야지”
“.....얘는 왜 왔어? 오랜만이다, 윤지우?”



“어... 누나.. 하하, 안녕? 아하하.. 반가워..”
“호호, 너희들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어색해보이네. 쿠쿠- 자, 너 여기 앉아.
지우랑 마주 보고 앉아서 이야기좀 하렴.
영애야~ 얘기는 이따가 와서 하고, 애들 왔으니까 우리 어서 음식부터 가져오자”
“그래!”




영애와 유미는 자기들끼리 쿡쿡 신나서 샐러드바를 가지러 멀어져간다.
주 메뉴는 나중에 시키고 일단 샐러드 위주로 먹기로 한 모양.
졸지에 나은과 단 둘이 남겨진 지우는 말그대로 멘붕 상황이 되버렸다.
왜 이런 시련이 나에게?
오, 신이시여, 갑자기 이런 고통을 주시나이까...



아무 말도 못하고 꼴깍, 침만 삼키며 유리잔의 물만 마실 뿐이다.
나은도 평소답지 않게, 지우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앉아 있다.
잠시 서로 조용하게 말 없이 창밖을 보며 딴청만 피운다.
그러다가, 나은이 슬쩍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아무 말을 안해?”
“그, 그러는 누나는... 누나가 가만히 있으니까 나도 썰렁해서 가만히 있지”
“풋- 짜식이 소심해. 학교는 잘 다녀?”
“응 잘 다녀. 누나두?”
“언제나 똑같지... 공부하느라 힘든 것 외에는”



그렇게 극히 형식적인 몇마디만 나누고 다시 분위기가 식어버렸다.
지우는 말없이 애꿎은 물만 홀짝거린다. 그러다가 앗- 하고 머리를 스치는 생각.
이렇게 나은 누나랑, 오랜만의 단 둘인 찬스라니- 이럴때 친해져야지 내가 뭘하는 거야..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어떻게든 화제를 꺼내고 싶어진다. 그런데..



때마침 나은이 핸드폰 액정만 들여다보며 집중하느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핸드폰을 꼭 이럴 때 뭐하러 보냐? --
괜히 어색하니까 자기도 딴 짓하네.



싸~한 분위기가 이어진 것도 잠시.
나은이 뭔가 생각나서 고갤 들고 입을 열려는 순간, 엄마들이 밝게 웃으면서 돌아왔다.
지우와 나은 간에 어떤 공기의 흐름이 있었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방긋 웃는다.



“어머, 우리 이쁜 애기들 분위기 좋네~ 나은이가 지우를 잘 챙겨주는가봐? 호호호”
“그러게~ 누나가 자상하게 동생을 돌봐주고 싶어하거든, 보기 좋아 역시 호호”
“-- 이건 무슨.....
샐러드로 이집 음식 다 비울 일 있어요..? 뭐 이렇게 많이 떠왔어..”
“쿡, 푸후후- 엄마 이게 다 뭐야... 네 접시에 잔뜩 퍼왔어? 크후후”



유미와 영애는 둘다 식탐이 강해서
음식을 두 접시씩 나눠서 아주 야무지게도 잔뜩 담아왔다.
일단 먹고 보자~! 에잇 질러- 하는 생각으로 대동 단결.
행복한 얼굴로 다양한 메뉴를 푸짐하게 내려놓고, 네 사람은 빠르게 먹기 시작한다.
아, 음료수를 안 떠왔네.. 영애의 부름에, 지우는 마지못해 나은과 같이 일어섰다.



“이쪽으로 와. 멍충아. 음료수는 이쪽에 있잖아. 너 여기 애슐리도 안 와봤어?”
“-.- 왜 멍청이야.. 여기는 와본적 없어서 그래”
“칫, 자주 좀 돌아다니고 그래라.
너 뭐 마실래? 골라”
“됐어. 나는 내가 알아서 우리 엄마꺼랑 떠갈테니까, 누나는 신경쓰지마”
“아쭈 이게..-_- 기껏 챙겨주려고 하는 사람한테 무슨 싸가지야...
너 설마 내가 방금 멍충이라고 그래서 삐친거야?”



“아니니까, 신경쓰지마. 누나랑 얘기하는게 어색해서 그러지”
“큭큭, 어색하기는.. 남자가-
자! 이거나 손에 들어, 받아! 어어..??
이 바보야! 그렇게 들면 흘리잖아! 손에 쥐어줘도 제대로 못받니?”
“.....갑자기 팍- 주니까 손에 못잡지! 아씨...
내껀 내가 떠간다는데 참견이야? 이게 뭐야? 옷에 다 묻었자나!!”



우려했던 일이 터지는 분위기다.
어째 말문이 좀 트여서 사이좋게 몇마디 주고받나 했더니
금새 그 어색한 분위기를 잘 승화시키지 못하고, 사소한 시비로 서로 싸운다.
지우는 갑자기 나은이 스프라이트와 미란다를 팟- 하고 건네는 바람에, 손에 맞고 옷에 다 엎질렀다.
새하얀 교복 상의가 졸지에 알록달록... 노란 형광색과 오렌지색으로 범벅이 되버린다.



지우는 짜증이 팍 치솟았다.
꼭지 확 도네.. 참자...
스르르- 밑에서부터 머리 꼭대기를 향해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겨우 참는 눈치다.
나은은 예상치 못하게, 지우의 교복이 탄산음료로 젖어버리자-
벙-찐 표정으로 우두커니 보고만 있다. 미안해서 어쩔줄 모르는 얼굴로.



“내가 미쳐- 교복 괜찮아? 얼른 가서.. 화장실에서 비누로 씻고 와..”
“괜찮아 보여 이게?! 놔, 걱정하지마. 알아서 씻을 거니까”



툴툴거리며 화장실로 향하는 지우.
저 망할 지지배를 만나면 역시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입만 열면 괜히 자길 혼내고 나무라기 일쑤고,
이렇게 어쩌다 밝은 마음으로 대화를 좀 해보려 하면.. 무슨 얄궂은 우연인지 사소한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에이, 짜증나... 교복에 묻으면 색 잘 빠지지도 않는데-
지우는 북북 비눗물에 교복을 문대며 열심히 지우려고 애쓴다.



“어서와~ 아들~ 옷은 잘 닦았어?
쿠쿠, 나은이 누나가 모르고 실수했대.
너 화장실 가고 나서 너무 미안하다고 아까부터 계속 그러드라. 호호”
“아, 아줌마.. 그런 말을 뭐하러 하세요오... 아이코-
뭘 보니? -.-
너한테 미안하다고 말한게 아니거든? 그렇게 보지마”
“참나 -- 나한테 미안하다고 직접 말해야 하는 경우 아닌가? 와..”
“이게 진짜? -.- 너희 어머니께서 내 대신 얘기하셨으니까 된거 아냐??”



“호호~ 얘들아? 적당히 사이좋은 줄은 알지만, 올만에 만나서 다투면 곤란하지~”
“너희들 모처럼 만났는데 분위기 이상하게 만들면 혼나!
너 나은이, 지우 만나게 된다고 들떠 있을 때는 언제고,
오랜만에 만나는 동생한테 심술부리고 못되게 굴래?”
“어, 엄마 나 그런 말 한적도 없는데 지어내지마! ..--.. 잘못했어요”



브라우니와 과일 몇가지를 디저트 삼아 먹고 네 사람은 애슐리를 나왔다.
두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할거냐고 묻는다.
지우는 옷도 아직 살짝 젖어 있고, 어서 집에 가서 쉬고 싶은 기색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은이 지우의 옆에 바짝 붙어서며 빙긋 웃는 것이 아닌가.
가식적인 행동이겠지만- 소녀는 엄마들에게 지우랑 따로 가겠다고 말한다.



이 여자가 무슨 꿍꿍이를 -_-...
약간 꺼림칙하기는 한데, 지우도 그러겠다고 받아들인다.
사정을 잘 모르는 영애와 유미는- 사이가 좋아 보이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보면서
둘만의 티 타임을 가지기 위해 영애의 차를 같이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너 어디가?”
“어디 가기는, 집에 가지”
“헐... 나랑 같이 안 놀거야?”
“놀긴 뭘 놀아? 어린 애도 아니고 야밤에. 누나도 집에 가야지”
“야- 가, 같이 가 그래도...”



귀엽게 생긴 나은은 가볍게만 인상을 써도, 꽤 차가운 얼굴로 굳어지는데
지금처럼 애써 배시시 웃으며 애교를 부리면 금새 아주 귀엽게 변한다.
지우의 기분을 풀어주기로 작정한 듯- 살갑게 붙어 서서 계속 말을 건넨다.
지우도 약간 어색하기만 하지, 싫은 생각은 없었다.



“고 3이라 정신없이 바쁘겠네, 누나는..”
“바쁘기보다는 마음에 여유가 없다고 해야겠지, 괜히 가슴이 갑갑하고-”
“그래도 원래 공부를 잘 한다며.. 우등생이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해”
“호호, 공부 잘하는 거랑은 관계가 없어. 스트레스는 누구나 받게 되어있거든”
“그런가? 난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본 적이 없어서..”



“여유 있어서 좋겠다, 너는. 아줌마가 성적같은 걸로 스트레스 안 주시지?”
“왜, 왜 안줘..? 뭐를 보고 그렇게 추측하는데, 우리 엄마도 은근하게 갈궈..”
“키키키, 그래? 내가 보기엔 아주 쿨~하게 보이셔서. 너랑 아주 친하시잖아”
“친한 건 맞지.. ㅋㅋ”



영애는 사실, 나은의 말대로 지우에게 성적에 관련하여 거의 터치를 안 한다.
지가 알아서 잘 하겠지- 하고 내버려둘 정도로 일부러 간섭을 안하는 눈치다.
가능하면 아이들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고,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요청하면
그때서야 물심양면으로 열심히 뒷바라지를 해주는 교육방침이다.
그녀 스스로도 이게 최선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는 그랬다.



“나 목말라 지우야, 그만 가고 거기 좀 서봐”
“어쩌라구? 집에 가서 얼른 물마셔”
“-_- 분위기가 영 꽝이네. 여기 들어가자. 시원한 거나 사줘”
“나뚜루? 내가 왜 사... 참나, 누나가 사도 모자랄 판에”
“호호호- 알았어, 내가 사면 들어갈 거지?
따라와, 내가 쏠게”



나은과 지우는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 산다.
영애가 현준에게 같은 동네 주민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자주 볼 수 있는데..
영애보다는 배우 신분인 유미가 요즘들어, 작품활동 때문에 부쩍 바빠졌다.
아이들이야 자기들끼리 친하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고.



지우는 투덜거리면서 나뚜루를 향해 나은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들어갔다.
평소에 싸가지 없고 못된 모습만 보이던 누나가, 오늘은 무척 다정하게 구니까
일부러 무뚝뚝하게 굴던 지우도, 마음이 누그러지고 기분이 좋아보인다.



-



이틀 뒤의 금요일 방과후.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지우가 엄마를 찾는다.
영애는 저녁 식사 준비를 하다가 아들을 보고 밝게 웃었다.



“일루 좀 와봐 엄마, 드디어 담주에 우리 수학여행 간다구!”
“호호호, 알고 있다니까. 그동안에는 별로 얘기 안하더니, 곧 가게 되니까 무지 설레?”
“그렇지 흐흐흐- 제주도라구! 제주도.. 얼마나 오랜만에 가는 건데”
“재작년에도 갔잖니.. 뭐, 친구들이랑 단체로 놀러가는 학창시절의 추억이니까-
남다른 여행인 거는 맞겠지만. 후후후-”



“큭큭, 자~ 여기 대략의 준비물들인데.. 통신문 다시 봐봐”
“또 나왔어, 뭐가? 지난번에 준 거 읽어서 아는데.. 돈은 이미 다 냈고.
아! 그러고 보니 생각이..”
“무슨 생각이 나는데?”
“어..?? 아, 아니야.. 지우야, 이번 수학여행, 안 가는 아이들도 있니?”



“ ?? 그거는.. 내일이 토요일이니까, 내일까지 수경이랑 임원들한테 통보하기로 되어 있어”
“아 그래? 아직 하루는 말미가 있다는 말이구나- 결정까지?”
“그렇지... 근데 왜 그 얘기를 해? 난 어차피 가기로 다 정해놨는데”
“응 흐흐훗, 암 것도 아니야. 학부모들 모임에서 어떤 엄마가 수학여행 때가 되면
알려달라고 부탁했거든. 자기 딸은 이런 학교 행사를 거의 얘기도 안한다면서”
“에이~ 그게 말이 돼. 학년이 다르면 몰라도 전교생이 다 아는데..”



영애가 잽싸게 둘러댄다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닌, 현준이 걱정되서였다.
아마도 짐작컨대- 현준은 ‘40만원’이라는 경비를 마련하기 매우 부담스러워 할 것이다.
자존심도 강해서, 자기한테는 그런 내색도 안 할 것이고..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영애는 오늘 꼭 현준에게 연락을 해야겠다는 급한 마음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 영애는 안방 문을 닫고 들어와, 차분하게 폰 버튼을 누른다.
현준과는 주로 문자로 이야기하거나, 전화를 걸어오는 쪽도 항상 현준이었는데
자기가 먼저 전화를 걸려니까 가슴이 두근 두근 뛴다.



“아! 누나다. 누나 어쩐 일이에요.
흐흐흐~ 먼저 전화를 다 주시고”
“호호~ 왜잉. 내가 전화걸면 안돼? 후훗♡
저기 현준아, 지금 시간 있어?”
“시간요? 시간은 만땅이죠~ 지금 잠깐 밖에 산책하러 나왔는데요.
안그래도 누나한테 전화라도 하려고 했었어요, 왜요?”
“아 그래? 내가 한 말은.. 조금 이따가 잠시 볼 수 있냐는 말을 하려고”



현준은 놀라서 목소리 톤이 저절로 커졌다.
이 저녁 시간에, 누나가 갑자기 나를 보자고? 왠일이야?
아- 짐작은 간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강 감은 올 것도 같았다.
현준은 피식- 웃으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말했다.



“하하하, 그래요. 누나가 보자고 하는데, 당연히 시간 내드려야죠.
저도 보고 싶어요 누나... 어디에서 몇시쯤에 볼까요?”
“지금 내가 그리로 갈게. 천호동 백화점쪽으로. 쿠쿠. 편하게 나와”



영애는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빠르게 차를 몰아 천호동에 도착했다.
현준은 영애의 빠른 결정과 신속한 행동에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누나의 한번 정하면 망설이지 않는 모습이 아주 기쁘고 반갑다.
그 바쁜 와중에도, 깔끔하게 차려 입고 나온 영애의 모습이 예뻤다.



“저녁은 먹었니?”
“아직요. 하하하. 역시 누나는 보자마자 식사부터 물어보시네요”
“후훗♡ 당연하지, 집에서 끼니는 거르지 않나 걱정이 되지. 잘 안먹을 때도 있다고 그랬잖아..”
“하하, 저 차에 타요?”
“응, 일단 타- 타고 어디서 뭘 할지 생각해보자 호호”



영애는 차 댈곳이 마땅치 않아서, 백화점 옆의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었다.
둘은 나란히 서서 걷는다.
현준은 스리슬쩍, 눈치를 살피다가 영애의 작은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
영애는 당연히 놀라서 얼굴이 발그랗게 물든다.



“여, 여기 사람 많아.. 좀 놔줘, 쭌아..”
“흐흐, 내껀데요 뭘. 부끄러워요?”
“.....좋긴 한데 부끄럽지.. 일단, 얼른 저리로 걸어가자.. 아휴..”
“캬캬, 아 귀여워.. 얼굴 완전 빨개요. 크크크”
“..........”



현준은 영애를 인도에서 반대방향으로 세워 놓고 걸었다.
오른쪽 팔을 길게 뻗어, 큰 어깨 안에 영애를 폭- 안아 놓고 감싸듯 걷는다.
조금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자- 영애도 한숨을 가볍게 내쉬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찌릿-! 매서운 눈매로 현준을 올려다본다.
캬캬. 현준은 그 영애의 눈초리마저도 너무 귀엽다.



“아, 왜요 또. 앙탈부리셔.. 큭큭큭”
“씨이, 사람 많은데서 막 껴안을 거야, 자꾸? --”
“언제는 스킨쉽 왜 못하고 쩔쩔 매냐면서요 하하하”
“흥, 그, 그거야... 내가 언제 그랬어!”
“그랬어요, 지난번에 여기 왔을 때에요. 하하. 이리 와요. 여기 벤치에 앉게”



현준은 긴 나무 벤치에 가볍게 걸터 앉아, 마치 어린아이에게 손짓하듯..
뻘쭘하게 서 있는 영애를 향해 오라고 자상하게 웃는다.
그 모습에 영애도 피시식- 웃으며, 살며시 다가와서 그의 곁에 가볍게 앉았다.






====

전개를 조금씩 빨리 가겠습니다.
저의 글 쓰는 패턴이 잔잔한 스타일과 서정적인 로맨스를 즐기다보니.. 스피디하지 못합니다 ㅠ
본래 기획할 당시 주인공 연인의 첫 성관계 시점은 늦어도 15부를 넘기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현재 18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본의 아니게 일부 독자분들을 [희망고문] 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섬뜩한 진단에, 어느 순간 문득, 매우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시국선언 파이팅!! 행동하는 젊은 지성이여, 그대들의 뜨거운 가슴을 마음으로 깊이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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