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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 정(慾 情) - 22부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2 00:30 1,080회 0건
그래서 다짜고짜 날 두들겨 팼군. 우씨. 정말 기분 엿 같네. 이놈 이야기는 황지연은 자기 같은 사람과 만나고 애 낳고 그럴 여자이긴 하지만 나 같은 놈과는 절대 침대에서 짝짜궁을 할 리 없는 여자라는 거잖아.

“여기 앉아 있어봐. 담배 한 대 피우고 올테니... 혹시 담배 피워?”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젓는 녀석을 놔두고 바깥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며 생각을 정리했다.

음.. 일단 녀석이 수긍할 수 있는 정도의 이유를 붙여 황지연과 모텔로 가게 된 사정을 이야기 해야 하는데, 그 속에 난 아직도 그녀가 뭘 하는 사람인지 모른다는 걸 강조해야 한다.

게다가 그 이유로 인해 이 녀석은 황지연과 나 사이에 끼여들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게 좋다. 내가 전과자가 되기 싫으면 빠지라는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이... 놈의 황지연에 대한 집착이 어느 정도 인지는 모르지만 강압적으로 녀석을 배제시키려 할 경우에는 변수가 생길 가능성이 더 많아진다. 본인이 나서지 않고도 주변 동료들이나 부하 직원들의 도움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녀석이니...

아.. 어렵네... 참... 황지연에 대한 마음 때문에 벌어진 일로 경찰 간부나 되는 녀석의 앞길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난 다시 녀석이 앉아 있는 대기실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여자 이름이 지연이라는 거 솔직히 몰랐어. 나한테는 주희라고 했는데... 처음 만난 건 두 달쯤 됐나... 강원도 쪽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접촉사고가 났어. 난 명함을 건넸고 그 여자는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주더군. 그쪽이 6 내가 4정도 책임이 있었는데 그냥 각자 보험처리를 하고 별일 없이 넘어 갔어. 하지만 정말 괜찮아 보이는 여자라 우리 집근처나 서울에 오게 되면 식사라도 같이 하자는 문자를 보냈어.

한 두,세 번 쯤 보냈나?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문자를 보내도 답장 한번 없기에 나도 그냥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열흘 쯤 전에 이 근처에 왔다고 해서 잠깐 만나 차를 마신 적이 있어. 그때까지만 해도 그 여자와 밤을 보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지.

난 오늘 안양에서 선약이 있었는데 그 여자가 낮에 문자로 시간이 있냐고 묻더군. 그래서 밤 10시 쯤에 약속이 끝나는 상황이라 오늘은 만나기 힘들 것 같다고 했는데 그 때라도 보자고 했어. 그게 지금까지 그녀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의 전부야.

같이 술을 마시면서도 별다른 이야기는 오고 가지 않았고 혼자서 빠른 속도로 술에 취한 그 여자를 부축해서 모텔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분명히 내게 여자는 가끔 누군가의 품에 안기고 싶을 때가 있다고... 하지만 오늘 이후로는 연락하지 말라고 하더군.

난 아쉬웠지만 그 여자의 말투는 왠지 무언가... 뭐라고 해야 되나... 내가 그녀를 유혹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풍겨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내가 궁금한 건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무얼 하는 여자 인지 이런 게 아니야. 그걸 알게 되면 나 역시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을 지도 모르니까. 하긴 그녀가 날 대하는 태도에서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었다면 모르지만... 나도 가정이 있는 사람이고 사춘기 소년처럼 사랑에 빠지기엔 너무 나이 들어버렸으니...

한 가지 궁금한 건 그 여자가 왜 내 뒷조사까지 했을까하는 건데... 경찰인 널 알아서 그냥 부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잘 모르겠어. 더군다나 옛 애인이었던 너한테 왜 그런 부탁을 했을까? 그냥 만나기엔 나라는 놈이 좀 무서워 보였을까?”

“그럼 지연이와 잠을 잔 건 오늘 처음이고 만난 지 두 번 밖에 안 되는 사이란 말인가?”

“세 번이지. 접촉사고 났을 때까지 하면... 앞으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으니 더 이상의 만남은 기대하기 힘들 것 같고... 내가 자세히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아마 그녀는 자신을 안아줄 익명의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 같아. 결혼을 한 유부녀인지도 나는 몰랐어.”

“익명의 누군가? 자신에 대한 것을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을 말하나?”

“응... 당신은 나보다 더 스타일이 좋고 젊고 능력 있는 남자지만 그녀가 안길 수 있는 남자는 아닐 수도 있어. 그녀가 누군지도 알고 그녀의 주변 사람들도, 결혼을 한 여자인지도 모두 알고 있으니까...”

이 녀석이 황지연의 남편 이유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녀가 내게 그 이야기를 할 가능성은 별로 없으니 이놈에게 넌지시 좀 알아둘까? 지금은 그 것보다 이놈이 순순히 물러나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지만...

“어쨌든 오늘 그녀는 외로워보였어. 하지만 나와 헤어질 때는 전혀 아쉬워하는 눈치는 아니더군. 당신은 걱정이 될지 몰라도 당신이 상상하는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거야. 누군가를 협박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는 건 나하고 생리적으로 맞지 않아. 아마 내가 그럴 작정이었다면 당신에게 그녀가 누군지부터 알아내려 했겠지.

만약 오늘 내게 보인 분노가 아직도 그녀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어 그런 거라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데 나에게 푸는 건 맞지 않아. 대상을 잘못 잡은 거야.”

일단 이 녀석이 의혹을 품을 만한 부분은 대충 정리했는데... 왜 본인에게 뒷조사까지 부탁했을까? 하는 것이 조금 걸린다. 녀석이 그걸 황지연이 자신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을 해준다면 좋을텐데...

“일단 여기 일부터 정리하지. 경찰직에 있는 사람이 오죽 했으면 사람을 팼을까만은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공무원 증 있어?”

“있소. 그건 왜?”

“일단 여기서 앞,뒤 복사해서 당신 명함과 같이 주고 병원비는 카드로 계산해. 그리고 아마 오늘 쉬어도 내일 아침에 회사 출근하기는 힘들 것 같으니 내일 오후 4시 쯤 여기서 다시 만나자고. 그때 공무원증은 칼라로 복사해서 다시 가져 오고 병원비 외에 약간의 합의금을 준비해둬. 많이는 필요 없고 2~3일 회사에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상과 추후 진료비 정도... 진료비를 계속 당신이 카드로 계산한다면 현금은 50만원 정도면 될 것 같군.

그리고 간단한 확인서 같은 걸 써와. 오늘 상해를 입힌 사실을 인정하고 추후 민,형사상 책임을 지겠다는... 나도 옛날 같은 계통의 일을 했던 놈이니 ‘눈 가리고 아웅’할 생각하지 말고. 물론 사건 처리할 생각은 아직 없어. 하지만 난 당신이라는 사람에 대해 확실히 모르고 그냥 대비해두자는 거야.”

“차라리 그 열배를 드릴 테니 각서 같은 건 쓰지 않는 게 어떻겠소?”

“500만원? 별 의미 없어. 돈을 챙기려고 마음먹었으면 그 것보다 더 불렀을 거야. 난 그냥 구만리 같은 젊은 인생 앞길 막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만의 하나 때문에 그러는 거니까...”

“만의 하나? 어떤 경우를 말하는 거요?”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상대하는 데 그 정도 대비는 해두자는 거지. 자필로 서명한 확인서는 받아야겠어.
더도 덜도 쓸 필요 없어. 간단히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적고 시인하는 정도면... 없었던 일 적으라는 것도 아니잖아? 그 정도 위치에 있으면서 책임을 회피하지는 않겠지?”

“책임을 회피하자는 건 아니오. 그냥 그만큼의 대가를 돈으로 치룰 수 있다면 좋겠다는 거요.”

“별 걱정 안 해도 돼. 지금은 전혀 사용할 생각이 없으니까. 어차피 당신 입장에서 선택권은 없어. 나 지금 많이 피곤하니까 내일 오후에 다시 보자고.”

“...”

잠시 후 공무원증 복사해 온 것과 명함을 대조해 보니 경감 선승철이라고 적혀 있었다. 난 선승철과 헤어져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와이프에게 대충 자초지종을 둘러 대고 잠이 들었는데 하루종일 잔 후에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전화해서 병가를 내고 몸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아 다시 잠을 청했다.

점심 때 쯤 일어나 밥을 먹고 다시 00병원으로 갔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타박상 외에 골절이나 금이 간 것은 보이지 않는 다는 검진 결과를 듣고 선승철을 기다렸다. 4시 경 그가 도착했고 서류봉투를 내밀기에 확인해보니 내가 요구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난 그와 함께 병원을 나와 근처에 있는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가서 앉았다.

그 곳에서 칼라로 복사한 공무원증, 현금 50만원, 그리고 확인서 등을 꺼내어 살펴보니 확인서 내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날 폭행한 사실은 분명히 적혀 있었지만 정확한 이유는 적지 않았고 대리 운전기사를 사칭한 사실도 빠져 있었다.
“진단서를 떼지는 않았어. 다행히 타박상 외엔 별다른 게 보이지 않는다고 하고. 입안이 얼얼거려서 뭘 먹는 게 힘들기는 하지만... 그런데 확인서 내용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군. 너무 대충 쓴 거 아냐?”

“그래도 당신을 폭행한 사실은 분명히 적었소. 다른 내용을 적자니 지연이에 대한 것 까지 써야할 것 같아서 그만...”

그 때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는 여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렸고 선승철이 커피를 받아 왔다. 난 말이 없이 한동안 커피를 마시다 그에게 물었다.
“크게 어긋난 곳도 없으니 앞으로는 만날 일이 없을 것 같군. 그런데 궁금한 게 한 가지 있는데 대답해주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이건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묻는 거니까.”

“뭐요?”

“선승철씨는 결혼을 했어?”

“아직 안했소.”

“왜? 그 여자 때문인가?”

“아니오. 지연이와 헤어진 건 벌써 5년 전 일인데...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소.”

“내가 볼 때는 당신 상당히 멋있어. 직업도 괜찮은 데다 탈도 좋고...”

“탈?”

“응. 괜찮은 이미지를 풍기는 탈을 가졌어. 난 얼굴을 탈이라고 생각하거든. 어차피 한 겹만 벗겨내면 누구나 비슷하게 생긴 해골을 가지고 있지만 그 걸 둘러싼 탈이 운명을 좌우하니까.
그런데 당신처럼 괜찮은 남자를, 그것도 결혼을 전제로 6년이나 만나온 사람을 버리고 택한 놈은 얼마나 대단한 놈이지? 어제 당신이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궁금해 지던데...”

“... 음... 나도 그땐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 녀석에 대해 알아보려 했었소. 하지만 그 녀석을 보는 순간부터 조금씩 포기가 되더군. 결국 엄청난 좌절감에 빠져서 한동안 술만 마시며 살게 되었고...”

보는 순간 포기? 무슨 말이야? 6년 사귄 여자를 포기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 쉬워? 보는 것만으로 체념을 했단 말인가?
이유성을 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섹시한 남성미를 풍기던 근육과 커다랗고 단단한 물건, 그리고 착한 눈망울을 가진 모범생처럼 보이는 얼굴. 어두운 곳이어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기 때문에 크게 다가오지는 않았었지만...

좀 더 긁어대면 이 자식이 이유성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털어 놓을까? 나와 황지연의 만남에 이유성이라는 카드 자체가 필요 없어 졌으니 선승철이 자연스럽게 털어 놓지 않는다면 굳이 이 녀석에게 알아내려 할 필요는 없는데...
“이야기하기 그렇다면 하지 않아도 돼. 그만 일어날게. 이 돈은 앞으로 병원을 오게 되면 진료비 내고 회사 출근을 못한데 대한 보상금으로 받는 거니까 너무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선승철에게 짧은 인사를 건네고 일어났다. 내가 너무 캐고 들어가는 건 선승철 입장에서 보면 이상하다고 여겨질 수 있다. 선승철은 범죄심리학이나 심리전에 대한 교육을 많이 받았을 것이고, 상식적으로도 황지연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이야기를 해 놓고 그게 뭐가 그리 궁금한 일이라고 내가 캔단 말인가?

“잠깐... 이게 다요? 다 끝난거요?”

선승철의 목소리가 돌아서는 내 뒤쪽에서 들렸다. 난 고개를 돌려 다시 물었다.

“응? 무슨 소리야? 그럼 뭐가 더 있어야 돼?”

“아니 그게 아니라... 난 제대로 사과도 하지 않았고... 형씨가 하는 말이 맞다면... 아니 지연이와 형씨가 원나잇스탠드로 끝나는 사이였다면 형씨 입장에선 정말 억울한 일일지도 모르는데 이 정도에서 그냥 물러나겠다는 게 좀 이해가 안돼서...”

이런... 실수인가? 이 녀석 말이 일리가 있다. 돈을 뜯어내려고 해도 천만원 정도는 어렵지 않을 것이고... 녀석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해도 선승철은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할 상황인데 너무 쉽게 봐 주고 일어선 게 되나?

그걸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내 생각으론 아직까지 녀석의 개입을 막는 확실한 방법은 모르겠지만 느낌으로는 새벽에 벌어진 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는 감 때문이었는데... 또 만약 내가 선승철에게 상당한 돈을 받은 사실이 혹시라도 황지연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걸로 인해 그녀와의 만남이 어긋날 수도 있는 노릇이고...
“그게 그렇게 되나? 음...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슨 기분이 들지 모르겠는데 난 당신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해. 예전에 나도 당신과 비슷한 감정에 빠져 누군가를 팬 적도 있고...
당신에게 돈을 좀 더 뜯어낼 수야 있겠지. 하지만 그건 내가 별로 원하는 일은 아니야. 그렇게 생긴 돈으로 우리 가족 부양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냥 잊자고. 없었던 일로... 확인서는 지금처럼 별 일 없이 시간이 지나면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게.”

“별 일 없이 시간이 지나면?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이 녀석... 혹시 확인서 써 준 것 때문에 나를 다시 불러 세웠나? 내가 이렇게 말만 해 놓고 뒤통수 칠까봐... 후후... 그렇다면...

“나처럼 평범한 회사원이 볼 때는 당신 같은 경찰 간부, 또 그 지연이라는 여자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지 잘 모르잖아. 난 이대로 끝나기를 원하지만 당신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냥 보험 같은 걸로 받아 둔거야. 하지만 밟지 않으면 꿈틀 댈 일도 없지 않겠어? 신경이 많이 쓰여?”

“알았소. 그리고 미안하게 됐습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연락 주십시오. 신세 꼭 갚겠습니다.”

“상처가 아물 때쯤이면 모두 잊혀지겠지. 그럼 이만.”

난 커피 전문점을 나왔다. 선승철이 앞으로 황지연과의 만남에 끼어들지 않기를 바라면서...

솔직히 말하자면 이유성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었지만 이유성이라는 놈은 내게 피해를 주기 보다는 반사적이나마 이득을 주는 녀석이라 굳이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들춰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선승철을 건드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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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은 후에 미정이 사진을 좀 볼 수 있냐고 했더니 방구석에서 할머니가 손녀의 사진첩을 내 오셔서 보여 주셨다. 친구들 보다 키가 훨씬 큰 미정이는 사진 속에서 항상 활짝 웃는 얼굴이었는데 남자와 같이 찍은 사진은 몇 장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하지만 그 중 유독 눈에 띄는 사진이 한 장 있었는데...

그 사진은 중학교 무렵 수영부 시절 사진 같았는데 젊은 남자 한 명이 남,녀 수영부원들과 함께 웃고 있었다. 20대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눈에 뜨일 정도로 미남이거나 멋있게 보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눈이 약간 찢어 졌고 턱선이 날카로워 전혀 호감이 가지 않는 인상이었지만 누군지 알아봐야 할 필요성이 있어 보였다.

잠시 후 난 미정이 할머니께 은행에서 인출해둔 돈이 담긴 봉투를 드리면서 이야기 했다.
“이 거 얼마 안 돼지만 받아 두세요. 필요할 때 쓰시고...”

“이게 다 뭐야? 필요 없어요. 늙은이가 돈 쓸 때가 어디 있다고 이렇게 큰 돈을...”

난 봉투를 받는 것을 자꾸 주저 하시는 할머니께 내 마음이 불편해서 안 된다고 하며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다고 했다. 미정이가 쓰던 방에서 자고 가게 해달라고...

할머니는 오랫동안 비워둔 방이라 불편할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잠깐 기다리라고 하신 후 방 청소를 하시고 이부자리를 봐 주셨다. 미정이의 사진첩을 옆에 끼고 그 방에 들어서니 습하고 눅눅한 냄새가 풍겼고 벽지는 군데군데 찢어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지만 여름이라 하룻밤 잠을 자는 건 크게 상관이 없어 보였다.

난 방 구석에 놓여 있는 허름한 책상 위 책꽂이에 미정이가 학창시절에 보았을 책 들을 꺼내 하나하나 넘겨보았다. 전질로 된 동화집 같은 것은 없었고 그냥 낡은 단편 소설 들이 몇 권 꽂혀 있었는데 서랍을 열어보니 노트와 다이어리가 꽤 많이 있었다.

그 중에는 일기장 같은 것도 몇 권 있었는데 초등학교 때 꽤 길게 적던 일기는 중학교 이후 부터는 간단히 그 날 기억나는 것들만 한, 두줄로 적고 있었다.

예를 들면 소풍을 어디로 갔다. 소고기를 먹었다. 버스비가 없어서 걸어서 집으로 왔다. 이런 식이었는데 중학교 1학년 11월 무렵부터 날짜에 하트를 둘러 씌운 날이 한 달에 2~3일 정도 있었고 그건 생리가 시작된 걸 표현한 듯 했다.

계속 적은 건 아니지만 며칠을 빼고 적었더라도 곧 다시 이어지던 다이어리는 중학교 3학년 여름 무렵까지만 적혀 있었다. 그리고 다른 서랍을 뒤져도 그 것 외에는 찾을 수 없었다. 난 중학교 3학년 다이어리를 하나하나 읽어보기 시작했다.

내용을 보니 3월부터 합숙훈련이 있었는데 별다른 기숙사 같은 것이 없어서 학교의 빈 교실에서 숙식을 했던 것으로 보였다. 8월 체육부장관배 전국 수영대회에 대비해서 그 대회가 열리는 부산 00체육관 수영장으로 여자부원 4명과 남자부원 5명이 7월에 전지훈련을 일주일 갔는데 다이어리는 그 직전 까지만 씌어져 있고 그 이후 내용은 비어있었다.

미정이의 주종목은 평영 100m. 다이어리에는 그 해 6월 말 무렵 교생으로 온 남자선생님이 고등학교 때까지 수영선수였고 수영부 보조 코치도 겸하게 되었다는 내용도 있었는데 다른 날의 분량에 비해 좀 길게 적혀 있었고 새 코치 선생님에게 50미터 턴을 해서 후반부로 갈수록 발차기 힘이 떨어지는 것과 스타트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느린 것, 호흡을 하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갈 때 몸 상태가 수면과 평형을 유지하도록 더 신경을 쓰라는 것을 지적받았다는 것과 지금 기록보다 1초 이상 앞당기지 않으면 전국대회 입상은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내용도 씌어 있었다.

난 당시 무언가가 미정이를 힘들게 한 것은 없는 지 중학교 3학년 다이어리를 계속 되풀이해서 읽어 봤지만 그런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의문점이 생긴 건 전지훈련을 간 이후부터 왜 다이어리를 쓰지 않았을까 였는데 그 이유를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미정이 외엔 없을 테니 별 수 없이 다이어리를 덮어야만 했지만 사진첩에서 본 젊은 남자가 나온 사진에 찍혀 있는 날짜가 1996. 7. 12 인 것으로 보아 사진 속의 남자는 당시 교생으로 온 수영부 코치인 것으로 짐작이 갔다.

미정이가 열여섯 살인 중학교 3학년 때 대학교 4학년이었다면 8살 정도 차이, 그 남자는 내 또래였다. 하지만 교생으로 온 대학생이 중학교 여학생을 건드렸을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너무 위험한 행동 아닌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된 상황에서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사춘기 여학생을 안을 생각을 하는 건 너무 위험한 일 같은데...

잠시 후 방에 누워 잠을 청하면서 일단 유진이라는 중학교 시절 수영부 친구를 만나봐야 할 것이고 거기서 무슨 실마리가 잡히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난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흘러갔고 자정을 지나 새벽이 왔다. 미정이 방의 방문은 예전 한옥집에서 볼 수 있는 한지 문이었는데 약간 찢어진 곳은 신문지 같은 것으로 막아 놓았지만 문틈 사이로 스산한 바람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난 그 곳에서 중학교 3학년의 미정이가 되어 누워 있었다.

언덕 위 외딴 곳에 놓여 있는 집에 나이 든 할머니와 예쁘게 생긴 손녀가 살고 있었다. 그 손녀는 중학생 이라고 보기에는 조숙한 몸매와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한밤에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어렵지 않게 열 수 있다.

자주 보게 되면 좋은 것은 가지고 싶은 탐욕이 생기는 법. 미정이의 첫 남자는 이 마을에 있을 수도 있다. 야심한 새벽 울타리도 없는 집으로 들어와서 그 애를 덮치는 누군가를 상상하며 난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고 난 미정이를 덮친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그 그림자는 복면을 쓰고 그 애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위협해서 조숙한 중학생의 옷을 벗겨 내렸다. 그리고 그 애의 몸을 주무르고 팬티를 벗기고 자신의 흉측한 물건을 미정이의 몸 안에 집어넣었다. 파랗게 질린 미정이의 얼굴이 보였고 얼마 뒤 자신의 볼일을 다본 그림자는 소리 지르면 모두 죽인다고 그 애를 한 번 더 위협한 뒤에 마당으로 나와 언덕을 내려갔다.

난 그림자를 따라 갔고 그가 복면을 벗고 언덕 위의 미정이 집을 다시 한 번 바라보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복면 안에 숨어 있던 얼굴은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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